글로벌 경제와 증시에서 미국이 독주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미국 달러화의 성격이 달라지고 있다. 각국 중앙은행이 준비 자산으로 축적하는 ‘기축통화’에서 미국 자본시장에 진입해 수익을 올리기 위한 ‘수익통화’로 변신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1944년 브레턴우즈 체제 성립으로 달러가 기축통화 지위를 획득한 지 약 80년 만에 나타난 변화다.
8일(현지시간)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한 세계경제전망(WEO)에 따르면 미국 경제는 올해 2.3%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유로존 전체 성장률(0.9%)이나 영국(1.0%), 캐나다(1.1%), 일본(0.6%) 등보다 훨씬 성장속도가 빠르다. 미 국채 10년물 금리는 연 4.5%대로 한국(연 4.2%대)보다 높다. 미 증시는 올 들어서만 23차례 최고치를 경신했다.
민간 투자자금이 미국에 몰리면서 달러화 수요는 갈수록 늘고 있다. 이에 따라 달러 매수 주체는 각국 중앙은행에서 연기금과 헤지펀드, 개인투자자로 바뀌고 있다. 외국인의 미 국채 보유 비중은 민간 투자자(58.1%)가 중앙은행 등 공공 부문(41.9%)을 추월했다.
애덤 투즈 미 컬럼비아대 교수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문에서 “미국의 적자는 유럽, 한국, 대만, 일본에서 들어오는 돈으로 충당된다”고 묘사했다. 그는 “오늘날 미국의 통화는 유동성의 약속이자 자본 축적을 위한 수단”이 되었다면서 이를 “이윤 추구형 달러(profit dollar)의 시대”라고 명명했다.
달러의 안전자산 기능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투자 수단으로서 역할이 강화되면서 시장 움직임에 달러 가치나 미 국채금리가 출렁거리는 일도 잦아지고 있다. 배리 아이켄그린 미국 UC버클리 교수는 한국경제신문에 “외국인 투자자 구성이 변화하는 현상은 향후 국채시장에서의 자금 유출을 촉발해 미국 금리의 변동성을 훨씬 더 크게 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경제 정책 불확실성도 달러의 성격을 바꾸는 데 일조하고 있다. 지난해 4월 미국이 상호관세를 발표한 ‘해방의 날’에 미 증시와 달러가치, 국채의 가치가 동반 하락한 것은 미 달러가 전통적인 안전자산의 역할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고 학자들은 평가한다.
8일(현지시간) 기자와 통화한 브래드 세처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은 최근 달러화 매입 수요가 그 이전과 비교해 구조적으로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으로 유입된 자금의 대부분은 안전자산을 추구하는 투자자가 아니라 평균 이상의 수익(알파)을 추구하는 투자자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는 “달러가 더 이상 안전자산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면서도 “다만 미국으로 유입되는 자금의 성격이 변했고, 달러의 위험자산 성격이 강화됐기 때문에 증시 폭락과 달러 매도가 함께 발생하는 상황이 나타날 리스크가 커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럽중앙은행(ECB) 이코노미스트 출신인 야콥 아돌프센 등은 최근 ‘최근 몇 년간 미 달러와 안전자산 간 상관관계가 감소했다’는 요지의 글을 발표했다. “미국의 순대외투자포지션(NIIP·미국인의 해외 투자에서 외국인의 미국 투자를 뺀 것)이 약화하면서 달러의 안전자산 통화로서의 지위도 흔들리게 됐다”며 “달러 표시 자산이 제공하는 헤지 효과도 과거에 비해 덜 효과적으로 바뀌었다”고 평가했다.
특히 각국 중앙은행의 달러 보유 비중 감소는 달러 지위의 근본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중국 공공부문의 달러 매수세가 잦아들면서 지난 10년 동안 세계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 총합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같은 기간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 규모는 덩치를 급속도로 불려왔다. 국제수지는 경상수지와 금융수지의 합이므로, 경상수지 적자만큼 누군가는 미국의 국채 등을 사들이고 있는 의미다.해외 중앙은행을 대신해 달러 수요자의 역할을 차지한 것이 민간 투자자다. 미국 의회조사국(CRS) 보고서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외국인이 보유한 미 국채 규모는 모두 9조2000억달러다. 이 중에서 5조4000억달러(58.1%)를 민간 투자자가 보유하고 있다.
미 증시에 대한 투자 수요가 특히 컸다. 미국 재무부에 따르면 외국인이 보유한 미국 달러표시 자산 중 주식 비중은 2023년 6월 말 51.1%에서 지난해 6월 말 56.2%로 커졌다. 같은 기간 장기채 비중은 44.5%에서 39.2%로 낮아졌고, 단기채 비중은 4.4%에서 4.7%로 상승했다. 단기채는 결국 주식투자로 돌아설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인공지능(AI)과 빅테크가 주도한 미 증시 투자 붐이 달러 수요를 견인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한국의 서학개미도 ‘수익통화’로 달러에 접근하는 대표적 사례다. 한국예탁결제원의 해외주식 보관액 규모는 2021년 678억달러에서 올 5월 말 1800억달러로 급증했다. 애덤 투즈 컬럼비아대 교수가 ‘한국 등이 미국의 적자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표현한 배경이다.
이는 미 국채 등 달러표시 자산군 전반의 변동성을 키우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배리 아이컨그린 UC버클리 교수는 “외국인이 미국에 투자하려 할 때, 이들은 우선 미 재무부가 발행한 단기 국채를 매입해 자금을 예치해 뒀다가 적절한 때 AI 관련 주식 등을 산다”고 했다. 그는 미국이 좋은 투자처로 여겨지는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라면서도 “헤지펀드 등 민간 외국인 투자자는 보수적인 중앙은행의 준비자산 관리자보다 훨씬 변덕스럽게 움직인다”며 “작은 악재 하나만으로도 베팅 방향을 뒤집을 수 있다”고 짚었다.


마이런 전 이사 등의 논리는 기축통화 발행국이 경상수지 적자를 감내해야 하며 이는 기축통화의 가치를 훼손한다는 ‘트리핀의 딜레마’ 이론에 기반해 있다. 하지만 1960년대에 등장한 이 가설은 현재 국제경제의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이 많은 경제학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핵심적인 근거 중 하나는 비 기축통화국들이 달러를 반드시 상품과 교환할 필요는 없으며, 보유하고 있는 다른 자산과도 얼마든지 교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리스 옵스펠드 미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 선임연구원은 이와 관련해 지난 4월 작성한 글에서 “미국은 외국의 상품이 아니라 자산을 ‘수입(거래)’할 수 있다”고 표현했다. 예를 들어 미국 투자자들이 삼성전자 주식이나 서울의 오피스빌딩을 사면 한국은 달러를 받을 수 있다. 이런 거래는 경상수지 적자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또 다른 근거는 달러를 ‘창출’하는 역할이 반드시 미국 중앙은행(Fed)이나 미 재무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역외 시장에서도 달러가 창출된다. 1960년대 영국 런던에서 시작된 ‘유로달러(미국 밖의 은행에 예치된 달러표시 예금)’가 대표적이다. 일정 규모의 달러 예금을 받은 역외 금융기관이 이를 바탕으로 달러 자금을 대출해 주면서 실질적으로 달러의 유통량은 승수효과에 따라 늘어난다. 해당 금융기관은 미 Fed에 지급준비금을 예치하지 않아도 달러를 유통하는 데 문제가 없다.
미 달러표시 자산의 주요 구매자가 민간 투자자로 바뀐 현 상황은 트리핀의 딜레마에 기반한 마이런 등의 논지를 더 약화시킨다. 비아지오 보소네 세계은행 선임고문은 유럽경제정책연구소(CEPR) 포털에 기고한 글에서 “글로벌 유동성 창출의 메커니즘 자체가 변했다”면서 “트리핀의 세계에서는 국가가 희소한 자원을 발행하지만, 현 세계에서 유동성은 탄력적이고 주로 민간 부문에서 창출된다”고 분석했다. 그는 “우리는 더 이상 달러의 지위가 미국의 경상수지에 달려 있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고 평가했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김주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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