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일 울산 문수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울산 HD와 전북 현대의 프로축구 경기. 골을 넣은 전북의 이승우가 ‘파라파라 춤’을 추더니 뻗은 손으로 뒤집어진 V자를 만들어 보인다. 같은 날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KBO 프로야구 올스타전에서도 두산 베어스의 정수빈이 똑같은 춤과 포즈로 팬들을 웃겼다.
뒤집어진 V자는 한국식 ‘손하트’처럼 새로운 촬영 자세가 됐다. 지난 8일 넷플릭스 시리즈 ‘동궁’ 제작발표회에선 배우 조승우가, 지난달 25일 드라마 ‘김부장’ 제작발표회에선 배우 소지섭이 이 V자를 내밀었다. 연예계와 스포츠계가 빠진 이 포즈의 정체는 걸그룹 ‘리센느’가 유튜브에서 보여준 자세. 중소 기획사에서 탄생한 이 5인조 걸그룹은 2년 전 낸 곡으로 지난주 음원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리센느가 일군 ‘중소돌(중소기획사 아이돌)의 기적’엔 대중적 친밀감을 빠르게 키워나간 캐릭터 구축 과정이 있었다.
대형 기획사의 덕을 볼 수 없으니 멋진 티저 프로모션이나 대형 방송 무대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시장 생존을 위해 리센느가 유튜브를 파고든 건 필연이었다. 여느 K팝 아이돌도 쓰는 유튜브지만 리센느는 자신들의 음악을 드러내는 데 힘쓰지 않았다. 대신 B급 감성과 친밀감을 앞세웠다. 멤버 원이의 유튜브 채널인 ‘안녕하세요원이입니다잘부탁드립니다’는 지난 2월 개설돼 지난 11일 기준 누적 조회수 2억3660만회를 기록했다. 이 채널엔 리센느 노래 영상이 없다. 멤버들의 예능 콘텐츠와 다른 가수 곡을 부르는 영상뿐이다.
리센느는 멤버별 지역성을 앞세운 캐릭터를 살려 팬덤 기반을 다졌다. 일본인 멤버인 미나미는 거제 여행에서 일본의 MZ 문화인 ‘갸루(소녀를 뜻하는 ’걸‘을 일본어로 부르는 말)’를 콘셉트로 잡았다. 남해 앞바다에서 파라파라 춤을 추며 갸루 특유의 점잔 빼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거제 토박이인 원이는 편한 운동복 차림으로 사투리를 쓰며 현지인과 소통했다. 그릇으로 라면을 푸거나 갯지렁이를 낚싯바늘에 끼는 모습이 영락없이 바닷마을에서 나고자란 서글서글한 소녀였다.
미나미가 손으로 뒤집어진 V자를 만들며 외친 “거제 야호”는 거제 소녀와 갸루가 충돌하면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이렇게 상반된 멤버들의 이미지가 인기를 끌면서 이 거제 여행 1편 영상은 지난 5월 공개 후 50일 만에 조회수 900만회를 넘겼다.
멤버들의 지역성은 비슷한 지역의 경험을 공유하는 시청자들을 끌어들일 무기가 됐다. 미나미와 원이는 실제 갸루를 직접 만나러 가면서 자연스럽게 영상 배경을 일본으로 바꿨다. 이어 현지에서 미나미의 본가에 방문하고 미나미의 옛 서예 스승을 만나는 콘텐츠를 통해 갸루 이미지를 진중하고 인간적인 서사로 치환했다. 다른 멤버들의 고향 이야기를 담은 영상들도 화제가 되면서 리센느는 거제뿐 아니라 경주, 고양, 수원 등 각자 고향에서 홍보대사로 임명됐다. 멤버들은 사투리를 소재 삼아 서울 성수동을 돌아다니며 세계관을 넓혔다.

여기에 리센느는 하루 7시간 넘게 라이브 방송을 하며 팬들을 만났다. 이미 라이브 방송이 흔해진 K팝 시장이지만 이 분량은 이례적이었다. 긴 방송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멤버들의 진솔한 모습은 곧 이 그룹의 이미지가 되면서 아티스트와 시청자 간 심리적 거리감을 좁히는 효과를 냈다. 다른 K팝 아티스트와 협업한 영상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응원하는 과정에서 인간적인 면모가 두드러졌다.
음악에서도 리센느는 친근함을 앞세우고 있다. 신비주의나 이질적인 음악은 우선순위가 아니다. 곡 러브 어택은 누구나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는 ‘이지 리스닝’ 콘셉트에 가깝다. 이 그룹이 지난 8일 낸 신곡 ‘프리티 걸’은 18년 전 카라가 낸 동명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음원업계 관계자는 “옛 인기 곡을 리메이크로 내놓는 K팝 아이돌은 과거에도 많았지만 리센느는 원곡 분위기를 최대한 살려 과한 편곡을 하지 않았다”며 “카라 음악을 듣고 자랐을 30·40대가 호응하기에 좋은 선택”이라고 말했다.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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