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술품을 사서 갤러리에 맡기면 매달 수익금을 지급하고 계약이 끝난 뒤 원금도 돌려주겠다며 1000억원이 넘는 투자금을 끌어모은 뒤, 약속한 수익금과 원금을 지급하지 않고 돌려막기 사기행각을 벌인 서정아트센터 대표가 1심에서 징역 18년을 선고받았다. 앞서 900억원대 투자금을 모집한 지웅아트갤러리 회장에게 징역 23년 선고가 최근 확정된 데 이어 아트컨티뉴 등 다른 아트테크 업체의 대표와 모집책을 겨냥한 수사도 이어지고 있다.
재판부는 “일부 피해자는 대부분의 재산을 잃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며 “대한민국 전체 미술시장에도 악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했다. 이씨가 약 141억원의 범죄수익을 취득해 호화생활을 한 것으로 보이고, 범행이 드러난 뒤에도 피해 회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점도 양형에 반영됐다. 검찰은 결심공판에서 징역 25년과 추징금 178억1530만원을 구형했다.
이씨는 2015년 10월 미술품 임대와 판매 등을 목적으로 서정아트센터를 설립했다. 회사 지분 100%를 보유한 대표이사로 사업과 자금을 총괄했고, 이후 판화 제조업체 서정아트프린팅과 미술품 판매·대여업체 서정아트프린트 등 관계회사도 잇달아 세웠다.
서정아트센터는 김환기와 이우환, 쿠사마 야요이 등 국내외 유명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키아프 등 주요 미술 행사에 참가하며 인지도를 쌓았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전시 공간을 마련하는 등 정상적인 갤러리와 같은 외관을 갖춘 점도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는 데 활용됐다. 이씨는 소속 작가의 작품을 구매해 센터에 맡기면 전시와 광고, 기업 렌털, 판화 제작 등으로 수익을 내 매달 투자금의 0.8%가량을 지급하겠다고 홍보했다. 계약이 끝나 작품이 팔리지 않으면 센터가 최초 구매가격에 다시 사들여 원금을 돌려주겠다고도 약속했다.
투자자들은 미술품 구매계약서와 재매입계약서 등을 작성했지만 대부분 작품 실물을 확인하지 못했다. 딜러가 보여주는 작품 이미지와 작가명, 작품 크기, 호당 가격만 보고 투자 여부를 결정했다. 조사 결과 투자계약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작품도 적지 않았다.예컨대, 이 대표는 부친이자 유명 작가인 이춘환 작가에게 투자계약이 체결된 뒤에야 그림 제작을 주문했는데 작품 한 점을 제작하는 데 일주일가량이 걸리며 계약 건수가 제작 가능한 물량을 크게 웃돌기도 했다.
투자자가 실물을 요구하면 센터 측은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거나 “외부 전시 중”이라며 시간을 끌었다. 그 사이 작품을 급히 제작한 사례도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약속한 수익을 감당할 사업 기반도 없었다. 법인을 상대로 한 미술품 렌털사업은 받은 렌털료의 90%를 계약 종료 뒤 법인 대표 개인에게 돌려주는 구조였고, 투자자에게 판매한 작품으로 만든 판화 매출도 3년 동안 약 11억원에 그쳤다.
이씨는 자금이 부족해지자 전환사채와 조각투자로 투자 상품을 늘렸다. 전환사채 투자금은 관계회사 사업에만 사용하겠다는 약속과 달리 기존 투자자의 수익금 지급에 쓰였다. 저작권 투자 계약이 끝난 일부 투자자에게는 원금을 돌려주는 대신 조각투자로 갈아타도록 권유했다.
2024년부터는 신규 투자금만으로 기존 투자자에게 지급할 돈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에 빠졌다. 서정아트센터는 지난해 5월 국세청의 계좌 압류 등을 이유로 수익금 지급을 중단했다. 이씨는 세무조사로 지급이 늦어진 것이라며 추후 일괄 지급하겠다고 밝혔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씨 측은 이를 근거로 원금을 보장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일부 투자자도 이씨로부터 직접 원금 보장이라는 말을 듣지는 않았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법원은 계약서 문구보다 실제 투자 모집 과정에서 이뤄진 설명과 거래 구조를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조각투자 계약서에는 작품이 팔리지 않거나 가격이 하락하면 계약 종료 뒤 투자금을 돌려준다는 조항이 있었고, 저작권 투자에서도 최초 구매가격에 작품을 재매입한다는 설명이 반복됐다.
딜러들은 투자자들에게 “금융상품이 아니어서 계약서에는 원금 보장이라고 쓸 수 없지만, 갤러리가 구매가격에 다시 사들이므로 사실상 원금이 보장된다”고 설명했다. 일부 계약서에는 원금 보장 내용을 수기로 적고 회사 직인을 찍어주기도 했다.
재판부는 계약서에 명시적인 원금 보장 문구가 없더라도 확정수익과 재매입을 약속하며 투자금을 모집한 이상 원금 보장을 전제로 한 투자로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형식적인 계약 조항만으로 유사수신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취지다.
645억원을 편취한 지웅아트갤러리는 미술품을 구매하면 매달 투자금의 약 1%를 지급하고 일정 기간 뒤 원금을 돌려주겠다며 투자자를 모집한 사건이다. 투자금 상당 부분은 미술품 사업이 아니라 부동산 개발사업 등 다른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조사됐다. 대법원은지웅아트갤러리 회장 최모씨의 상고를 기각하며 1심에서 내려진 징역 23년형이 확정됐다.
또 다른 아트테크 사기기업인 아트컨티뉴 사건에서는 약 320명의 피해자가 960억원가량을 투자한 것으로 파악됐다. 대표 엄모씨는 SNS 등을 통해 투자자를 모집하고 매달 원금의 12∼16%에 달하는 수익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한 혐의를 받고 있다.
법조계에 따르면 엄씨는 최근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졌다가 보석으로 풀려나 재판을 받고 있다. 경찰은 엄씨 외에도 투자 모집에 관여한 영업자 등 관계자 50여명을 입건해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피해자 측이 확인한 내용에 따르면 모집책 가운데 조사와 자료 정리가 끝난 약 3분의 2가 우선 송치됐고, 나머지 인원에 대한 조사와 검찰 보완수사가 이어지고 있다.
아트테크 사기가 반복되는 배경에는 미술품 거래의 불투명성과 투자자와 업체 사이의 정보 격차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술품은 공개시장에서 가격이 실시간으로 확인되지 않고 같은 작가의 작품도 크기와 제작 시기, 거래 이력 등에 따라 가격 차이가 크다. 일반 투자자는 업체가 제시한 가격이 적정한지, 작품이 실제 존재하는지, 다른 투자자에게 중복 판매됐는지를 확인하기 어렵다.
이지훈 심앤이법률사무소 변호사는 "미술품을 내세운 아트테크든, 명품이나 부동산, 가상자산을 내세운 다른 유사수신이든, 이런 사건들은 피해자를 끌어들이는 소재만 다를 뿐 본질이 완전히 동일하다"며 "어떠한 형태의 폰지사기라도 엄중히 책임을 묻겠다는 사법부의 판단이 확인된 만큼 지금 수사와 재판을 기다리는 다른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영총 기자 youngcho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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