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감으면 이탈리아 사람처럼 들려야죠"…아레나 디 베로나 사로잡은 바리톤 박영준

입력 2026-07-15 13:45   수정 2026-07-15 22:12

"눈 감으면 이탈리아 사람처럼 들려야죠"…아레나 디 베로나 사로잡은 바리톤 박영준



"눈을 감았을때 이탈리아 사람이 노래하는 것으로 들려야만 합니다."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는 동양인 성악가에게 좀처럼 쉽게 문을 열지 않는 나라다. 한두 차례 초청을 받아 작품에 출연하는 것은 사례가 있었다. 하지만 현지 극장의 신뢰를 얻어 시즌마다 재초청받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특히 이탈리아어의 발음과 뉘앙스, 무대 위 표현까지 자국 가수와 끊임없이 비교되는 동양인 성악가가 꾸준히 주역을 맡는 일은 드물었다.

바리톤 박영준(35)은 그 높은 벽을 뚫은 성악가다. 최근 이탈리아 무대를 제집처럼 드나들고 있다. 트리에스데 베르디 극장과 밀라노 라 스칼라를 거쳐 세계 최대 야외 오페라 무대인 아레나 디 베로나에 초청 받았다. 최근 그의 활동 반경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아르헨티나 콜론 극장으로까지 넓혀졌다.



13일 한국경제신문과 화상으로 만난 바리톤 박영준은 이탈리아 베로나에 머물고 있었다. 세계 최대 야외 오페라 무대인 아레나 디 베로나에서 공연을 이어가고 있는 그는 "천천히 성장하자는 마음으로 걸어온 시간이 이제야 조금씩 결실을 맺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발성의 기초는 한양대 이원준 교수님께 배웠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언어와 뉘앙스를 집중적으로 공부했어요. 콩쿠르에 나갈 때마다 심사위원들을 만나 '제가 노래하면 이탈리아 사람처럼 들리느냐'고 물었습니다."

이탈리아 사람처럼 노래 부르려 한 그의 노력은 결과로 이어졌다. 박영준은 2026년 트리에스테 베르디 극장 <일 트로바토레>의 루나 백작 역으로 한 해를 시작했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투란도트>의 핑,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콜론 극장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알피오와 <팔리아치>의 토니오를 노래했다.



현재 그는 세계 최대 규모의 야외 오페라 축제가 열리는 아레나 디 베로나에서 <라 트라비아타>와 <나부코>, <아이다>의 주역으로 무대에 오르고 있다. 베로나와 트리에스테, 밀라노 라 스칼라를 거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까지. 그의 이력을 보면 커리어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박영준은 '도약'보다 '결실'이라는 표현을 택했다.

"성악가로 활동하면서 세운 목표가 '천천히 성장하자'였습니다. 꿈꿨던 극장들에 하나씩 서게 돼 기쁘지만, 커리어가 갑자기 올라간다기보다는 그동안 노래한 시간이 조금씩 결실을 맺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계 무대로 향하는 출발점은 국제콩쿠르였다. 그는 리카르도 잔도나이, 파도바 국제성악콩쿠르 등 28개 국제콩쿠르에서 우승과 입상을 반복했다. 결정적인 순간은 2022년 오페랄리아 콩쿠르였다. 플라시도 도밍고가 창설한 대회에서 박영준은 3위와 롤렉스 특별상을 동시에 받았다.

"유학을 떠날 때부터 마지막 콩쿠르는 오페랄리아로 하고 싶었습니다. 좋은 결과를 얻고 콩쿠르를 졸업한 뒤, 가수로 활동하고 싶었어요."

특별상 부상으로 받은 롤렉스 시계는 자신의 손목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돌아갔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유학을 뒷바라지한 아버지를 위한 선물이었다.

박영준은 "처음에는 아버지가 제가 음악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그래도 힘들게 유학을 지원해주셨습니다. 관객상을 받으면 시계를 꼭 아버지께 드리겠다고 생각했어요."라며 "이제 아들이 노래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콩쿠르를 끝내고 성악가로 활동할 자격을 얻었다는 것을 아버지께 보여드리는 의미도 있었죠."



박영준의 주요 활동 거점은 고대 로마시대 원형경기장을 공연장으로 사용하는 아레나 디 베로나다. 약 1만3000석 규모로, 공연 때마다 통상 8000명에서 1만 명에 가까운 관객이 객석을 채운다. 천장도, 소리를 모아주는 실내극장의 벽도 없다.

"가수에게는 천장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상당한 압박입니다. 바람도 불고 소리가 울리지도 않죠. 하지만 무대가 객석에서 보는 것보다 아래로 들어가 있고, 원형 벽이 가까워 옆을 향해 노래할 때 오히려 소리가 크게 들리기도 합니다."

고대 유적은 그 어떤 무대장치도 대신할 수 없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때로는 공연 진행을 위협하기도 한다. "아레나 주변 도시에 비가 내릴 때면 무대 뒤로 번개가 치는 모습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오페라 속 인물 뒤로 실제 번개가 치는 거죠. 자연경관이 하나의 조명이 되고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줍니다."

"그날 공연은 새벽 4시쯤 끝났습니다. 투란도트 역 가수가 아리아를 부르던 중 공연이 멈춰, 같은 아리아를 두 번 부르기도 했어요. 마치 야구장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비가 내리면 공연은 즉시 중단된다. 오케스트라석에도 지붕이 없기 때문이다. 기상 상황에 따라 두 시간가량 기다린 뒤 공연을 재개하기도 한다. 그가 핑으로 출연한 <투란도트>는 비가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해 한 공연이 열 차례 가량 중단되기도 했다.



박영준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라 스칼라의 리허설에도 참여하며 세계 정상급 극장의 제작 시스템을 직접 경험했다. 특히 메트 오페라에서는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무대와 분업화된 운영 시스템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하루에 오후와 저녁 두 편의 오페라를 올리는 날도 있습니다. 몇 시간 안에 거대한 무대 세트를 교체해야 하니 모든 스태프가 전문적이어야 하죠. 무대와 의상, 분장부터 공연 진행까지 극장 시스템이 완벽하게 구축됐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는 세계적인 오페라극장이 단순한 공연장을 넘어 도시를 대표하는 관광·문화상품으로 자리 잡았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뉴욕을 찾은 관광객이 랜드마크를 방문하듯 자연스럽게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들릅니다. 라 스칼라와 아레나 디 베로나도 마찬가지죠. 공연이 도시의 대표적인 문화상품이기 때문에 공연 횟수가 많고, 그에 맞는 제작 시스템과 투자가 뒤따릅니다."

박영준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연출자 프랑코 제피렐리(1923~2019)의 프로덕션에도 다섯 편가량 참여했다. 영화감독으로도 활동한 제피렐리는 라 스칼라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아레나 디 베로나 등 세계 주요 극장에서 사실적인 무대와 압도적 스케일의 군중 장면을 선보인 거장이다. 화려한 볼거리뿐 아니라 가수의 동선과 연기를 음악의 흐름 속에 정교하게 설계한 연출로 대표된다.

베로나의 테아트로 필라르모니코 극장에서 공연한 <아이다>를 비롯해 아레나 디 베로나,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제피렐리의 무대를 경험했다.

"제피렐리의 무대에는 웅장함 안의 섬세함이 있습니다. 세트의 작은 부분부터 합창단과 배우들의 움직임까지 모든 것이 치밀하게 설계돼 있어요. 가수가 이동하는 동선과 노래하는 위치까지 고려돼 있어서 무대에 서면 ‘가수가 노래를 잘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놨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세계의 극장을 떠돌며 노래하는 성악가의 삶은 불안정하다. 박영준은 "해마다 다시 찾는 오페라 극장이 늘면서 낯선 도시는 조금씩 집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극장의 직원들, 티켓 판매원까지 모두 아는 극장에 다시 오면 마치 집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계속 불러준다는 것은 가수를 좋아하고 신뢰한다는 의미잖아요. 그런 극장이 이탈리아에만 여러 곳이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합니다."

박영준의 도전은 계속된다. 내년 이탈리아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 베르디 오페라 <에르나니>의 돈 카를로 역으로 데뷔한다. 국내 공연 제안도 받고 있다. 2년 뒤 유럽 극장 일정까지 확정돼 당분간 국내 팬들이 그의 무대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계속 가수로 활동하고 싶지만 한국에 계신 부모님의 외동아들입니다. 언젠가 고국에 돌아가지 않을까요. 그때는 큰 역할이 아니더라도 한국 관객들 앞에서 꼭 노래하고 싶습니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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