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4일 찾은 LS일렉트릭의 부산 초고압 변압기 제2공장. 이 공장에는 컨베이어벨트와 조립 로봇이 따로 없다. 그 대신 높이 3m, 둘레 2~4m의 철심마다 근로자 네다섯 명이 공구를 들고 달라붙어 있었다. 이들은 철심 주변에 절연체인 나무를 촘촘하게 엮는 작업부터 구리선을 감아 코일을 만드는 일까지 대부분 공정을 손으로 한다.
초고압 변압기는 인공지능(AI) 시대를 떠받치는 전력 설비지만, 이를 생산하는 과정은 역설적으로 ‘아날로그’ 그 자체다. 20년 이상 정교하게 구리선을 감아온 근로자의 손길을 기계나 로봇은 따라 할 수조차 없다. 허영무 LS일렉트릭 부산공장장은 “초고압 변압기에 들어가는 2000m 구리선을 감는 작업은 0.5㎜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다”며 “기계나 로봇이 대신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설명했다.
이들 근로자의 예민하고 섬세한 손기술이 없으면 전기가 끊기고 AI 세상도 멈춘다. 초고압 변압기가 부족해 AI 데이터센터 건설이 지연되는 병목 현상 또한 아날로그의 역설과 맞물린다.
17일 업계에 따르면 LS일렉트릭과 효성중공업, HD현대일렉트릭 등 국내 전력기기 3사의 지난 1분기 말 수주 잔액은 37조2765억원이다. 1년 전(24조8086억원)과 비교하면 50.3% 늘었다. 지금 초고압 변압기를 주문하면 최소 3년은 기다려야 받을 수 있다.AI 데이터센터를 지을 때도 숙련공의 손길이 닿아야 한다. 수많은 케이블과 냉각을 위한 관을 설치하는 게 이들의 몫이다. 미국에선 AI 데이터센터 건설에 투입되는 베테랑 전기기술자와 배관공의 몸값이 1억5000만원(연봉) 이상으로 치솟았다. 삼성SDS 관계자는 “공정 전체 흐름을 머릿속에 그려놓고 기기를 설치하는 건 기계가 아니라 오랜 경험을 쌓은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말했다. AI 시대 필수 부품으로 꼽히는 전선을 제조하는 과정도 수작업의 연속이다. 초고압 케이블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상하좌우 두께가 ㎜ 단위로 대칭을 이뤄야 한다. 10년 차 이상 근로자만 이 작업을 할 수 있다. 숙련된 근로자의 감각과 축적된 경험이 기계보다 더 정확한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반도체 공정은 대부분 자동화됐지만, 공정에 필요한 부품과 장비를 제조하는 과정은 다르다. 웨이퍼 주변을 감싸 불순물 유입을 막는 쿼츠웨어(석영유리)를 만들 때나 후공정 단계에서 불량 여부를 검사하는 부품인 테스트소켓을 제조할 때는 숙련공의 기술이 요구된다.
AI 시대를 움직이는 아날로그의 힘은 산업 명장의 ‘암묵지’(누적된 현장 노하우)에서 나온다. HD현대일렉트릭에서 37년간 변압기 테스트를 담당한 백종선 기감은 매번 작업 결과와 성공·실패 원인 등을 메모한다. 쌓인 공책만 20여 권. 후배들을 위한 업무 교본이자 회사의 핵심 자산으로 통한다. 암묵지를 보유한 숙련공은 글로벌 AI 패권 경쟁에서 한국이 살아남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무기라는 분석도 나온다. 민순홍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한국 제조업 현장의 숙련공이 쌓은 노하우는 해외 후발주자의 진입을 막는 해자(垓字)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리선 3000바퀴 감는 변압기…미묘한 강도 따라 성능 달라져

AI 데이터센터 필수품인 초고압 변압기와 차단기를 생산하는 효성중공업, LS일렉트릭, HD현대일렉트릭 등 전력기기 3사 공장에는 20년 이상 근무한 인력이 대부분이다. 변압기 공정의 핵심인 권선 작업에 투입되려면 최소 2~3년을 배워야 한다. 신입 직원은 선배의 움직임을 눈으로 외우는 기간을 거쳐야 업무를 맡을 수 있다. 권선 공정은 순도 99.999% 이상의 구리선을 2000~3000바퀴 감아 코일을 제조하는 작업이다. 장력이 조금만 달라도 절연 성능과 소음, 수명에서 차이가 발생한다. 다른 공장에서 보기 힘든 도제식 교육이 이곳에서 여전히 이뤄지는 이유다. 허영무 LS일렉트릭 부산사업장 공장장은 “지금 3차원(3D)을 넘어 자동 설계까지 구현하고 있지만 변압기는 아직 핸드메이드 제품”이라고 말했다.
수십t짜리 철심과 권선을 결합할 때도 도면으로 알 수 없는 미세한 간극과 하중 균형을 맞춰야 한다. 절연지의 수축과 팽창, 작업장 온습도까지 고려해 손으로 미세한 강도를 조절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제작한 높이 4m, 무게 100t짜리 초고압 변압기는 테스트를 마친 뒤 다시 분해된다. 이 상태로 배에 실어 해외로 보낸다. 한국 공장에서 변압기를 조립한 기술자도 동행한다. 배가 현지에 도착하면 한국 숙련공은 변압기를 손으로 조립한다. 현지 기술자의 손기술은 아직 한국 기술자의 예민한 감각에 미치지 못한다.
국내 전력기기 업체는 1960~1970년대 산업화가 본격화할 때 설립됐다. 당시 성장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전망이 지배적이었지만 이들 기업은 제조업 뿌리인 전력기기 산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다 AI 데이터센터 건설 붐이 시작됐고, 경쟁력을 키워온 한국 업체들은 전 세계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지난해 기준 미국 시장의 40%를 한국 업체가 차지했다. 한국 전력기기 3사 직원은 2023년 8589명에서 지난해 9258명으로 2년 새 700명 가까이 늘었다.
초고압 케이블의 핵심 부품인 종단 접속함은 숙련공이 없으면 제작이 불가능하다. 부품의 정렬과 결합 상태를 금형 및 절연재 조립, 제품 검수 등 단계마다 베테랑 근로자가 직접 확인해야 한다. AI 데이터센터에 전력을 공급하는 데 필요한 배전 설비인 버스덕트의 절연 공정도 사람 손을 거친다. 전기가 통하는 도체에 비닐을 감싸는 작업인데, 기포 없이 붙이려면 기계로는 한계가 있다.
데이터센터를 관리할 때도 숙련공이 필수다. 전력, 냉방, 배관, 네트워크 같은 물리 인프라 문제를 현장에서 확인하고 복구하는 건 기술자가 해야 한다. 한승연 포스코DX 프로는 “연구실에서 아무리 시뮬레이션을 돌려도 공장 바닥의 미세한 경사, 철강 제품의 반사광 같은 요소는 현장에서 봐야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로봇 활용도가 높은 공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한 대기업의 인공지능 전환(AX) 담당자는 “로봇과 자동화 설비를 늘릴수록 오히려 점검하는 인력의 숙련도가 중요해진다”며 “설비를 만져본 경험, 장애 상황에 대처하는 판단력, 공정 전체를 보는 감각은 오랜 기간 일한 숙련공에게만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도병욱/부산=신정은/원종환/이영애 기자 dod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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