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언어가 흐르는 성벽 위로 한강의 '새'가 날아올랐다

입력 2026-07-23 17:17  

두 개의 언어가 흐르는 성벽 위로 한강의 '새'가 날아올랐다


뜨거운 여름밤, 중세 교황청에 눈이 내렸다. 지난 15일 밤 10시 프랑스 아비뇽 교황청 명예극장. 한낮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야외였지만 무대 뒤편 거대한 석조 성벽의 아치형 창문 사이로 하얀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하자 객석에는 순식간에 겨울의 공기가 감돌았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1부를 무대로 옮긴 낭독극 ‘새(oiseau)’가 베일을 벗었다. 프랑스 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경하’를, 한국 배우 이혜영이 ‘인선’을 맡아 목소리를 합쳤다. 1947석 규모의 명예극장은 관객들로 빈틈없이 들어찼다. 자정이 가까워서야 끝난 공연이었지만 관객들은 두 시간 가까이 높은 집중력을 보였다.

두 배우는 순백의 의상을 입고 등장해 프랑스어와 한국어를 오가며 대사를 주고받았다. 연출을 맡은 줄리 델리케는 “두 마리 새를 떠올리게 하고,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경계도 상징했다”며 “두 배우의 몸이 마치 하나의 몸처럼 보이게 했다”고 설명했다.

무대 뒤 성벽 창문에는 눈발이 흩날리는 영상이 비쳤다. 돌벽 위 흩날리는 눈은 한강 소설 특유의 차갑고 고요한 정서를 드러냈다. 델리케는 “마치 작은 스노볼을 들여다보는 듯한 이미지를 떠올렸다”고 했다.

공연의 절정은 마지막 5분이었다. 한강이 무대에 올라 3부 ‘불꽃’ 속 인선의 대사를 육성으로 낭독했다. 몽환적으로 흐르던 무대가 제주 4·3 사건이라는 역사적 현실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델리케는 “두 여성의 이야기가 꿈과 같은 픽션의 세계라면 작가의 목소리를 통해 관객을 갑자기 현실로 끌어내려고 했다”며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처음 마주할 때의 충격을 무대에서도 느끼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강이 자신의 문장을 읽어 내려가자 객석의 침묵은 한층 깊어졌다. 낭독이 끝난 뒤 한강과 위페르, 이혜영이 나란히 무대에 서서 인사하자 그제야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관객들은 “책으로 만난 작품을 목소리로 들을 수 있어 좋았다” “한국어가 작품의 시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해줬다”고 입을 모았다.

공연을 앞두고 만난 한강은 자신의 소설이 ‘극화’가 아니라 ‘낭독’ 형식으로 무대에 오른다는 점에 끌렸다고 했다. 그는 “제가 쓴 문장들이 책장을 벗어나 배우의 목소리와 몸, 공간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이 새롭고 특별했다”고 말했다. 또 “너무 더운 계절에 아주 추운 겨울 이야기를 보며 땀을 흘려야 했지만, 돌로 된 성벽이 주는 밤의 힘과 어둠 속 약간의 불빛이 있어 그 겨울 느낌이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고 밝혔다.

아비뇽=설지연 기자/김은진 아르떼 객원기자 sj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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