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 그림 한 점이 있습니다. 데이비드 호크니(1937~2026)의 '예술가의 초상(두 사람이 있는 수영장)'입니다.
쨍한 햇살 아래 한 남자가 물속을 헤엄치고 있습니다. 다른 남자가 수영장 끝에 서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군요. 수영하는 모습을 보여줄 정도로 친밀한 사이지만, 서 있는 남자는 함께 수영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양복바지에 구두, 재킷까지 갖춰 입은 차림만 봐도 알 수 있지요.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서는 묘한 위화감과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이 그림은 수영장을 그린 그림 중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비싼 작품입니다. 2018년 11월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이 그림은 9분 만에 9030만달러(약 1300억원)에 팔렸습니다. 살아 있는 화가의 그림값으로는 사상 최고 기록이었지요. 그림을 그린 호크니는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화가'로 불린 인물. 지난 6월 그가 88세로 세상을 떠나자 영국 국왕과 총리가 애도를 표했고, 전 세계에서 추모가 쏟아졌습니다.

그는 왜 이토록 큰 사랑을 받았을까요. 호크니의 수영장 그림은 왜 그렇게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비싸게 팔릴까요. 오늘은 부고 기사에서 미처 다루지 못했던, 그가 걸어온 길과 작품세계를 찬찬히 돌아봅니다.
호크니의 재능은 금세 빛났습니다. 그가 그림을 처음 판 건 지금으로부터 71년 전인 1955년 1월, 영국 리즈의 한 전시장에서였습니다. 만 열일곱 살의 미대생 호크니가 처음으로 판 그림은 아버지의 초상화. 그림값은 10파운드(약 40만~50만원)였습니다. 훗날 호크니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가난한 미대생 시절이었다. 다음 주 월요일 학교 친구들에게 한턱내느라고 1파운드를 썼는데, 그 1파운드가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다."


호크니의 재능, 그리고 반항아 기질은 젊을 때부터 유명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스물네 살 때 '우리 두 소년, 꼭 붙어서'(1961)를 발표한 것입니다. 호크니는 게이였지만, 당시 영국에서 동성애 행위는 법으로 금지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호크니는 이에 저항하는 의미로 보란 듯이 두 남자가 끌어안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졸업 때는 학교와 정면으로 붙었습니다. 당시 RCA를 졸업하려면 교양과목 에세이를 제출해야 했는데, 호크니가 "화가는 글이 아니라 그림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며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보통 학생이라면 몰라도 호크니는 이미 RCA의 '간판 스타'. 영국 미술의 기대주로 언론을 탄 데다 재학생 때부터 그림이 잘 팔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학교는 위원회를 열어 호크니를 졸업시키고, 졸업장과 함께 최우수 학생에게 주는 금메달을 안겨 줬지요.
졸업 후 1년 반 사이에 호크니는 이미 스타가 됐습니다. 전속 갤러리가 생겼고, 판화 연작은 출판사가 5000파운드에 통째로 사 갔습니다. 갓 졸업한 화가에겐 거금이었습니다. 1963년 12월 런던 첫 개인전도 성황리에 끝났습니다. 한 달 뒤, 그는 판화로 번 돈을 쥐고 로스앤젤레스로 떠났습니다. 화면으로만 보던 할리우드의 햇빛을 직접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착륙을 앞두고 내려다본 도시에는 파란 점들이 무수히 박혀 있었습니다. 수영장이었습니다. "영국에서 수영장은 사치품이지만, LA에서는 아니었어요. 싸구려 아파트 단지에도 수영장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호크니는 LA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일 년의 절반이 잿빛인 브래드퍼드에서 자란 호크니에게 LA는 일 년 내내 여름인 '꿈의 도시'였습니다. 동성애를 숨기지 않아도 되는 곳이기도 했지요. 수영장에 있는 물은 그에게 좋은 소재가 됐습니다. "물을 그린다는 건 만만치 않은 문제입니다. 물은 무엇이든 될 수 있으니까요. 어떤 색도 될 수 있고, 움직이고, 정해진 생김새가 없습니다." 그렇게 그의 '수영장 연작'이 탄생했습니다.
그전까지 수영장을 본격적인 그림 소재로 삼은 화가는 없다시피 했습니다. 너무 평범하고 사소한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호크니는 '움직이는 물과 빛'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풀어내 수영장 그림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술집과 뱃놀이 풍경을 그린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 처음에는 비난을 받았지만, 이제는 신화와 성경, 황제와 왕을 그린 그림 옆에 당당히 걸려 있는 것처럼요. 교외 주택 뒷마당의 물빛, 햇빛과 여가, 전후(戰後) 캘리포니아의 풍요…. 오늘날 세계가 로스앤젤레스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의 상당 부분은 호크니의 그림에서 왔습니다.

대표작 '더 큰 첨벙'(1967)은 수영장 홍보 책자에 실린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됐습니다. 다이빙 직후 솟구친 물보라. 호크니는 그 장면에 푹 빠졌고, 화면 대부분을 롤러로 밀어 칠한 뒤 물보라를 작은 붓으로 2주에 걸쳐 그렸습니다. "물보라는 아주 짧은 순간만 지속됩니다. 사진은 그 순간을 얼려 버리지요. 실제로 우리 눈에는 물보라가 그런 식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림으로 그리면, 실제 물보라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2초 동안 지속되는 것을 2주에 걸쳐 그리는 일이 좋았어요." 무엇보다도 호크니에게 물은 '그리는 재미'가 있는 소재였습니다.

2인 초상을 시작한 계기는 사소했습니다. 1962년 독일 베를린의 박물관에 간 호크니는 일행을 놓쳐 한참 헤매다가 이집트 조각상 옆에 서 있는 친구를 발견했습니다. 그 장면이 호크니에게 영감을 줬습니다. "친구와 조각상이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는데 재미있고 묘했어요. 그림에 사람이 두 명 있으면 이야기가 생긴다는 사실을 그때 떠올렸습니다."
두 사람을 그리는 건 그냥 초상화를 두 번 그리는 게 아닙니다. 배경이 어떤지, 누가 서고 누가 앉는지, 시선이 어디로 가는지만 봐도 둘 사이의 공기를 비롯해 여러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1533)이 그랬던 것처럼요.


호크니의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술품 수집가 와이즈먼 부부를 그린 그림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심상치 않은 그림이지요.
먼저 호크니에게 "남편을 그려 달라"고 부탁한 사람은 아내인 마샤 와이즈먼이었습니다. 호크니는 처음에 이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잘 모르는 사람의 그림을 그리는 '사교계 초상화가'가 되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호크니는 미술품이 가득한 부부의 집을 보고 나서 마음을 바꿨습니다. 미술품과 함께 있는 인물화를 그리고 싶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호크니는 부부를 자신이 본 대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막상 완성된 그림을 보고 부부는 크게 당황했습니다. 표정과 자세, 분위기가 너무 안 좋았거든요. 부부는 이 그림을 샀지만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3년도 안 돼 이 그림을 갤러리에 되팔았고, 돌고 돌아 작품은 1984년 미국 시카고미술관에 들어갔습니다. 지금 이 작품은 시카고미술관의 대표 소장품 중 하나로 꼽힙니다.

'클라크 부부와 퍼시'(1970~71)는 호크니의 2인 초상화 중에서도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절친한 패션 디자이너 부부의 결혼을 축하하며 공짜로 그려 준 선물이었고, 퍼시는 고양이의 이름입니다. 발표 당시 미술계의 평가는 차가웠습니다. 타임스는 "유난히 밋밋하고 긴장이 없다"고 혹평했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은 훗날 테이트 미술관의 간판 그림이 됐고, 2005년 BBC의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그림' 투표에서도 5위에 올랐습니다.
공교롭게도 서먹해 보이는 모습으로 그려진 두 부부(와이즈먼 부부와 클라크 부부)는 훗날 모두 이혼하게 됩니다. 호크니는 "일부러 의도를 가지고 서먹한 모습을 그린 것은 아니다. 나는 당시 내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렸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만 호크니, 그리고 그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담은 2인 초상은 세상에 없습니다. 훗날 호크니는 회고했습니다. "그리려고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헤어졌지요. 그 뒤로는 영영 있을 수 없는 일이 됐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피터 슐레진저. 1966년 LA의 드로잉 수업에서 만난 열한 살 연하의 미대생으로, 5년간 호크니의 연인이자 단골 모델이었습니다. 호크니는 수영장에서 헤엄치는 피터를, 물 밖으로 나오는 피터를, 잠든 피터를 수없이 그렸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1971년 여름 스페인의 해변 마을에서 크게 다툰 끝에 헤어졌습니다. 서른네 살의 호크니가 처음으로 겪는 실연이었습니다.

"너무 불행해서 일하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습니다. 석 달간 하루 열네댓 시간을 그렸어요. 지독하게 외로웠습니다." 맨 앞에서 소개한 그림 '예술가의 초상'이 바로 이 시기에 나왔습니다. 시작은 작업실 바닥에 우연히 나란히 놓인 사진 두 장이었지요. 물속을 헤엄치는 남자,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남자. "사진이 놓인 모양새 때문에 마치 한 사람이 물속의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곧바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제작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첫 번째 그림에 여섯 달을 매달렸지만 수영장 각도가 마음에 안 들어 통째로 버렸습니다. 전시 개막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한 달 남짓. 남프랑스에서 참고 사진을 찍어 오고, 조수에게 피터의 분홍 재킷을 입혀 모델을 세우고, 마지막 2주간 하루 18시간씩 그림을 그리는 강행군 끝에 호크니는 마침내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림 속에서 분홍 재킷을 입은 피터는 물속의 누군가를 말없이 내려다봅니다. 두 사람은 아주 가까이 있지만, 심리적 거리감은 한없이 멀게만 느껴집니다. 물속에 있는 '누군가'가 호크니 자신이라는 해석도, 피터의 새 연인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호크니는 한 번도 답을 밝힌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작품은 46년 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살아 있는 화가의 그림'이 됐습니다. 호크니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수영장 그림과 2인 초상화가 합쳐진, 대표 걸작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사람이 세상을 보는 방식은 정반대입니다. 사람은 '두 눈'으로, 고개를 돌려 가며 '여러 시점'에서, '시간을 들여' 세상을 인식하거든요. 사진 한 장을 30초 이상 들여다보는 건 쉽지 않지만, 렘브란트의 초상화 앞에는 몇 시간이고 서 있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호크니는 생각했습니다. 그림에는 화가가 바라본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으니까요.
그러던 1982년, 마흔다섯 살의 호크니는 사진의 단점을 보완할 힌트를 우연히 찾게 됩니다. 작업을 하다가 폴라로이드(즉석카메라) 필름이 잔뜩 남은 게 계기였습니다. 호크니는 필름을 다 쓰기 위해 마구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거실을 찍었는데, 한 장으로는 방이 다 담기지 않자 여러 장을 이어 붙였습니다. 그러자 여러 순간과 여러 방향의 시선이 담긴 화면이 완성됐습니다. 사진으로 사람처럼, 그림처럼 보는 방법을 찾아낸 겁니다.

사진 수십 장을 모자이크처럼 이어 붙인 연작 '조이너'는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호크니는 석 달 만에 150점을 만들 만큼 빠져들었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페어블로섬 하이웨이'(1986)입니다. 미국 사막의 교차로를 사진 수백 장으로 다시 짠 작품이지요. 가까이서 보면 낱장 사진들의 모자이크인데, 물러서서 보면 도로 표지판과 사막 덤불 하나하나가 또렷한 하나의 풍경이 됩니다. 표지판은 올려다본 시점으로, 길바닥의 쓰레기는 내려다본 시점으로 찍혀 있습니다. 한 화면에 여러 시점을 담는다는 점은 폴 세잔의 그림, 그리고 피카소의 입체파 작품과도 닮아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호크니는 여러 새로운 도구를 시험했습니다. 복사기로 판화를 찍었고, 브라질의 전시장에 작품 대신 팩스 144장을 보낸 적도 있었습니다. 예순이 넘어서는 고향 요크셔로 돌아가 들판을 그렸습니다. 캔버스 50개를 이어 붙인 12m짜리 나무 그림을 야외에서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70대에 접어든 호크니는 자기 마음에 쏙 드는 그림 도구를 만나게 됩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였습니다. "엄지로 그렸습니다. 오른손에 들면 엄지가 화면 구석구석 다 닿거든요. 왼손에는 담배를 들 수 있고요." 그렇게 호크니는 아침마다 아이폰으로 침대에서 꽃을 그려 친구들에게 전송했습니다. "친구들이 아침마다 신선한 꽃을 받는 셈이지요. 게다가 내 꽃은 시들지 않습니다."
2010년 아이패드가 나오자 호크니는 여러 대를 한꺼번에 주문했습니다. 태블릿PC가 있으면 물감이 마르길 기다릴 필요도 없고, 물통을 씻을 필요도 없고, 언제 어디서든 꺼내 그림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화면은 종이와 달리 스스로 빛을 냅니다. 동트기 전 어둠 속에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뜻이지요. 평생 빛을 그려온 호크니에게는 그야말로 꿈같은 도구였습니다. "윌리엄 터너가 봤다면 사랑했을 겁니다. 수채물감보다 훨씬 빠르게 빛을 잡아낼 수 있거든요."


그해 프랑스에서 호크니는 아이폰과 아이패드로 그린 그림을 전시했습니다. 작품들은 액자 대신 화면에 담겨 걸렸습니다. 이를 두고 "낙서 같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호크니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즐거워하는데 무슨 상관입니까."
코로나19로 세계가 멈춘 2020년 봄에는 봉쇄된 프랑스 노르망디의 시골집에서 매일 아이패드로 마당의 봄을 그렸습니다. 여든셋이었습니다. 수선화 네 송이를 그린 그림에는 이런 제목을 붙였지요. '봄은 취소할 수 없다는 걸 기억하세요.(Do remember they can't cancel the spring.)' 이듬해 런던 왕립예술원에는 봄 그림 116점이 걸렸습니다. 그의 봄 그림들은 답답하고 두려운 전세계인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줬습니다.

호크니는 이런 비판에 매우 신경질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수십 년을 거장으로 대접받으며 노인이 된 후에도, 호크니는 젊은 시절처럼 언제나 제멋대로였습니다. 1990년 영국 왕실이 기사 작위를 주겠다고 하자 그는 거절했습니다. "나는 상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왕의 초상을 그려 달라는 요청도 사양했다고 전해집니다. '아는 사람만 그린다'는 원칙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저기에 독설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호크니를 사랑했습니다. 그의 그림이, 정확히 말하면 그의 시선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1997년 호크니의 절친한 친구 조너선 실버는 암으로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호크니는 실버의 병문안을 오가며 그 길에 있는 고향 요크셔의 들판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실버는 그 그림을 보고 호크니에게 이런 부탁을 남겼습니다. "그 그림들을 계속 그리게.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삶은 축하할 만한 일이니까." 훗날 누군가 물었습니다. "당시 그렸던 그림을 보면 친구의 죽음이 떠오르나요?" 호크니는 답했습니다. "아니요. 친구의 삶이 보입니다. 우리가 죽은 친구를 떠올릴 때, 그 친구가 죽어 가던 모습을 떠올리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살아 있던 모습으로 떠올리지요."
호크니가 사는 방식은 그랬습니다. 캘리포니아의 햇살과 출렁이는 물, 곁에 있던 사람들의 가장 빛나는 모습, 아침의 꽃, 해마다 돌아오는 봄... 누가 뭐라 하든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누구나 한눈에 좋아할 수 있도록 그리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그림들을 통해 사람들은 늘 지나치던 풍경을 다시 새롭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호크니의 눈을 빌려 세상을 보면서, 사람들은 호크니가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방식을 배웠고, 살아갈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렇게 작품 활동을 이어가던 호크니는 지난 6월 11일 런던 자택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날도 런던에서는 그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부고 성명에는 그가 수십 년간 편지와 팩스 끝에 서명처럼 적어 온 두 단어가 적혀 있었습니다. Love Life. 삶을 사랑하라는 뜻이었습니다.

<i>*호크니의 명복을 빕니다.</i>
<i>**이번 기사는 Christopher Simon Sykes의 'David Hockney: The Biography'(전 2권)를 중심으로, David Hockney가 쓰고 Nikos Stangos가 엮은 'David Hockney by David Hockney', Marco Livingstone·Kay Heymer의 'Hockney's Portraits and People', Lawrence Weschler의 'True to Life: Twenty-Five Years of Conversations with David Hockney'와 테이트미술관·크리스티 자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문화재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국내 문화 분야 구독자 1위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기자 페이지 구독 버튼을 누르시면 미술 소식과 전시에 대한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는 디트로이트 미술관 걸작전 <인상주의를 넘어: 디트로이트 미술 걸작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시리즈에서 다룬 여러 거장들의 명작들을 실제로 볼 기회입니다. 최근 출간된 책 '명화 시리즈' 완결편 <명화의 완성, 그때 그 사람>과 함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