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금자씨' 막내 스태프, 세계 최고 오페라 무대 디자이너 됐다

입력 2026-08-03 17:47   수정 2026-08-03 17:49

'친절한 금자씨' 막내 스태프, 세계 최고 오페라 무대 디자이너 됐다



세계 정상급 소프라노로 꼽히는 리세트 오로페사가 주인공 '엘비라'를 노래한 벨리니의 오페라 <청교도>가 지난달 19일 영국 런던 로열오페라하우스(코벤트가든)에서 막을 내렸다. 세계 오페라 산업에서 '무대 미술' 분야 예술성의 최고를 인정받는 코벤트가든이 35년만에 선보인 뉴프로덕션이다. 세계 최고의 무대미술을 자랑하는 코이 공연의 무대를 설계한 사람은 한국인 무대디자이너 신혜미(44)다.


"무엇을 더하기보다 필요 없는 것을 빼는 것이 무대디자이너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신혜미는 지난달 31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디자인 철학을 이같이 설명했다. 무대에 놓인 모든 요소는 작품 안에서 분명한 기능과 의미를 가져야 하며, 아름다운 장식을 덧붙이는 데 그치지 않고 음악과 인물의 내면을 공간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어떻게 세계 오페라의 산실로 꼽히는 로열오페라하우스에서 35년 만에 새롭게 제작된 작품의 무대를 맡게 됐을까.

'친절한 금자씨' 막내 스태프 영국 오페라 심장으로


1982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용인과 수원에서 자란 그에게 공간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부모가 가꾼 집과 마당이었다. 아버지는 집을 직접 짓고 필요한 물건을 손수 만들었다. 뛰어난 미적 감각을 지닌 어머니와 함께 가꾼 어린 시절의 나무와 마당. 기억 속 풍경은 훗날 공간과 재료를 바라보는 감각의 토대가 됐다.

신혜미의 직업적 출발점은 오페라 현장이 아니었다. 홍익대에서 섬유미술과 패션디자인을 복수 전공하던 그는 학교를 휴학하고 박찬욱 감독의 영화 <친절한 금자씨>미술팀 막내로 참여했다. 당시에는 영화 미술 작가와 패션디자이너 사이에서 자신의 진로를 확신하지 못했다.

신혜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좋은 경험이었어요. 제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하고 싶은 일'과는 거리가 있었어요." 그는 "당시에는 방황의 시간을 보낸거라 생각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모든 시도와 경험이 작품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죠."

한 선배의 소개로 뮤지컬 전문 무대디자이너 박성민을 만나 그의 작업을 가까이에서 경험했다. 이때부터 신혜미는 무대미술가의 꿈을 키웠다. "무대 모형을 만들고 제작회의와 제작소 방문을 통해 작은 디자인이 실제 공연장의 거대한 공간으로 구현되는 과정이 신선했어요."

한국에서 이미 대학을 마쳤지만 무대디자인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가 학사과정부터 학업을 시작했다. 2011년 영국 공연예술계의 권위 있는 상인 린버리 프라이즈를 수상했다. 이 수상은 영국에 아무런 연고가 없던 신혜미가 영국 공연예술계 중심부에 진입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린버리 프라이즈는 완성된 디자인을 평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디자이너가 연출가와 극장 제작진을 만나 아이디어를 실제 공연으로 발전시키도록 하는 제도다. 신혜미는 수상 이후 영국 국립극장과 영빅, 로열오페라하우스의 린버리 극장 등에서 활동할 기회를 얻었다.

◇ 코벤트가든의 문을 열어준 리처드 존스와 스튜어트 랭

"지하철에서 메일을 보고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신혜미가 로열오페라하우스 주요 프로덕션의 메인스테이지를 책임지기까지는 영국 연출가 리처드 존스와의 인연이 결정적이었다. 현대 오페라 연출의 거장으로 인정 받는 존스는 로열오페라,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 뉴욕 메트로폴리탄과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오페라를 연출했다. 영국 최고 권위의 예술훈장인 CBE(대영제국 훈장)도 수훈했다.

에이전트를 통해 신혜미를 만난 존스는 1년동안 그를 지켜본 뒤 자신이 연출을 맡아 영빅에서 공연할 연극의 무대디자인을 제안했다. 영빅은 런던 워털루 지역에 위치한 영국을 대표하는 연극 극장이다.

존스는 첫 만남에서 신혜미가 앞으로 만나야 할 연출가와 디자이너들의 이름을 작은 종이에 적어 건넸다. 그중 한 사람이 스코틀랜드 출신의 스튜어트 랭이다. 랭은 1997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타이타닉> 무대디자인으로 토니 상 무대 디자인상을 수상한 무대 디자이너이자 오페라 연출가다. 어느 날 신혜미의 공연을 본 랭이 먼저 연락을 하며 인연이 시작됐다. 랭은 신혜미에게 자신이 연출하는 오페라에 의상디자인을 제안했다.



신혜미는 영국을 대표하는 두 거장 연출자, 존스와 랭에 대해 "강한 비전을 지녔지만 다른 제안에도 열려 있는 창작자"로 소개했다. "두 사람 모두 제가 아이디어에 자신이 없을 때에도 방향이 맞으면 확실히 지지해줘요. 강한 비전을 갖고 있지만 다른 제안을 받아들이고, 하나의 아이디어를 또 다른 아이디어로 이어가요."

신혜미와 존스의 협업은 베를리오즈의 <파우스트의 겁벌>, 생상스의 <삼손과 데릴라>, 벨리니의 <청교도>까지 이어졌다. 로열오페라하우스 메인스테이지 디자인을 처음 제안받은 작품도 존스가 연출한 <삼손과 데릴라>였다.

백석종·엘리나 가랑차, 리세트 오로페사와 손지훈과 만남



2022년 <삼손과 데릴라>에서 신혜미는 절제된 히브리인의 공간과 대비해 강렬한 오렌지색 속 화려한 패턴과 우상이 지배하는 필리스티아인의 세계를 대비적으로 표현했다.

이 무대에는 당초 출연 예정이던 테너 니키 스펜스가 부상으로 하차하면서 한국인 테너 백석종이 '삼손'으로 출연했다. 세계적 메조소프라노 엘리나 가랑차가 데릴라 역을 맡아 백석종과 호흡을 맞췄다.

"한국인 성악가의 참여 소식에 기대와 걱정이 함께 있었어요. 하지만 리허설에서 처음 백석종의 목소리를 듣고 걱정이 완전히 사라졌죠. 극장 관계자들로부터 사랑받는 모습을 보고 저까지 뿌듯했습니다.”




최근 막을 내린 <청교도>에서는 미국 출신의 세계적 소프라노 리세트 오로페사가 엘비라를 맡았다. 한국인 테너 손지훈도 아투로 역의 커버 가수로 참여했다. "무대 리허설에서 손지훈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는데 정말 감탄이 나왔어요. 앞으로 세계적 무대에서 좋은 활약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혜미는 <청교도>에서 엘비라의 불안과 정신적 붕괴에 집중했다. 밀실처럼 폐쇄된 공간에 누군가 안을 엿보거나 감시할 수 있는 구멍 같은 창과 통로를 반복하고, 전쟁을 연상시키는 어두운 색과 방어적인 구조를 이용해 억압된 세계를 고딕적으로 표현했다.



작품마다 그의 무대는 전혀 다른 얼굴을 갖는다. 알반 베르크의 오페라<보체크>에서는 계속 회전하는 무대로 보체크가 벗어날 수 없는 반복적 일상과 사회적 폭력을 드러냈다. 차이콥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에서는 러시아의 전원과 귀족 저택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지 않았다. 대신 넓고 어두운 무대와 소수의 의자, 내리는 눈과 하강하는 샹들리에만 무대에 남겼다.


벽과 천장이 적은 오픈형 무대는 관객이 인물의 기억과 관계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성악가의 목소리를 객석으로 반사하는 데에는 불리할 수 있었다. 제작진은 무대 양옆과 뒤쪽에 플라스틱 반사면을 보완하고, 성악가의 얼굴 방향과 위치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음향적 약점을 줄였다.

"성악가가 음향적으로 유리할지 불리할지 역시 무대미술 분야의 고려 대상이에요" "그럼에도 그 방향을 택하는 것은 연출가와 디자이너의 선택입니다. 모든 요소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기술적 협업이 중요합니다."




◇시각미 넘치는 새로운 오페라 시대
"어떤 디자인을 하더라도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줄 최고의 팀이 있어요, 어려운 부분이 생겨도 함께 해결할 동료와 전문가가 있다는 것이 든든해요."

신혜미가 말하는 세계적 오페라하우스의 경쟁력은 화려한 무대나 유명 성악가만이 아니다. 디자이너의 상상을 현실로 구현하는 장인과 기술자, 제작진이 하나의 팀으로 움직이는 시스템에 있다. 로열오페라하우스의 프로덕션은 일반적으로 공연 약 1년 전부터 준비된다. 디자인과 스토리보드, 모형을 공유하고 예산과 기술적 가능성을 검토한다. 세트와 소품의 제작뿐 아니라 안전한 장면 전환, 공연 후 보관과 향후 재공연 가능성까지 설계 단계에서 고려한다.





"좋은 오페라는 새로운 시각을 통해 관객이 느끼는 선입견과 거리감을 줄일 수 있어야 하죠. 잘 만들어진 오페라는 가장 깊고 풍부한 예술적 경험을 관객에게 공유할 수 있어요."

그는 한국 오페라계에도 전통적인 작품과 실험적인 작품이 공존할 수 있는 다양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작품을 선정할 때 이미 이름이 알려진 거장들의 프로덕션만 찾기보다 새로운 시각을 지닌 작품과 젊은 예술가에게도 기회를 줘야 한다"는 설명이다.

세계 오페라의 중심에서 한국인 디자이너로서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했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을 '협업하는 창작자'로 정의한다. "한 편의 오페라는 결코 혼자 만들 수 없어요. 디자이너의 아이디어를 현실로 바꿔주는 수많은 동료가 있죠. 그들과의 협업 의식을 가슴에 품고, 관객에게 가장 깊고 풍부한 예술적 경험을 전하는 무대를 계속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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