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을 통한 가업승계, 입법의 시계가 움직일 때 [서이헌의 법과 기업]

입력 2026-08-09 07:00   수정 2026-08-09 07:57

신탁을 통한 가업승계, 입법의 시계가 움직일 때 [서이헌의 법과 기업]

한경 로앤비즈의 'Law Street' 칼럼은 기업과 개인에게 실용적인 법률 지식을 제공합니다. 전문 변호사들이 조세, 상속, 노동, 공정거래, M&A, 금융 등 다양한 분야의 법률 이슈를 다루며, 주요 판결 분석도 제공합니다.




2024년 말 행정안전부는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주민등록 인구수가 1024만4550명으로 전체 주민등록 인구의 20%는 차지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UN의 구분 상 초고령 사회에 해당하는 것이다.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중소·중견기업 창업주들에게 가업승계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많은 기업인들은 여전히 가업승계를 상속세나 증여세 문제 정도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 현장은 훨씬 복잡하다.

법률·세무·신탁이 교차하는 문제


가업승계 과정에서 창업주는 서로 충돌하는 여러 목표를 동시에 달성해야 한다. 후계자에게 지분을 이전하면서도 일정 기간 경영권은 유지하고 싶을 수 있다. 가족 간 분쟁을 예방해야 할 수도 있다. 가업상속공제를 적용받은 뒤에도 수년에 걸쳐 복잡한 사후관리 요건을 준수해야 한다. 어느 하나만 놓쳐도 경영권 분쟁, 유류분 분쟁, 거액의 추징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실제로 후계자에게 지분을 미리 증여했다가 경영권 분쟁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있고, 가업상속공제 적용 이후 사후관리 요건 위반으로 거액의 추징세를 부담하는 사례도 나타난다. 이러한 위험은 가업승계가 단순한 세금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따라서 가업승계는 상속세 절감 만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법률, 세무, 신탁을 함께 설계해야 하는 복합 과제다.

신탁은 ‘승계 설계’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탁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신탁을 활용한 가업승계는 크게 세 가지로 설계가 가능하다.

첫째, 의결권 신탁(Voting Trust)이다. 이 구조에서는 지분을 수탁자에게 이전하되, 의결권은 창업주가 일정 기간 보유하도록 계약에 명시할 수 있다.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제112조는 신탁재산에 속하는 주식의 의결권을 수익자의 이익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행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를 활용하면 창업주가 경영권을 실질적으로 유지하면서도 단계적 지분 이전이 가능하다.

그런데 현행 법제상 신탁업자가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 한도는 발행주식 총수의 15%로 제한돼 있다. 의결권 신탁 구조 만으로 창업주의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에는 한계가 발생할 수 있다. 금융위원회도 이러한 점을 인식해 ‘가업승계 목적 신탁’에 대한 의결권 제한 합리화를 정비 과제로 제시한 바 있으나 후속 입법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둘째, 수익자 연속 신탁이다. 창업주를 1차 수익자로, 지정된 후계자를 2차 수익자로 설정하면 창업주 사망 시 수익권이 자동 이전된다. 이를 통해 수익자 결정에 대한 혼란이나 유언무효 소송 등의 분쟁은 방지할 수 있다. 다만 수익자 연속 신탁이 유류분 분쟁의 여지까지 차단하는 만능의 수단은 아니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따라서 수익자 연속 신탁이 온전히 기능하려면, 신탁재산의 유류분 산정 기초재산 산입 여부 및 평가 기준에 관한 신탁법 차원의 입법적 정비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

셋째, 세법상 가업상속공제와의 연계 설계다. 신탁 계약서에 가업용 자산 처분 제한, 업종 유지 의무, 고용 인원 기준을 명문화해 두면 사후관리 요건 위반을 구조적으로 차단하는 안전장치가 될 수 있다.
입법의 시계가 움직여야 할 때…


금융위도 이미 신탁을 초고령사회에 필요한 종합 재산관리 인프라로 육성하겠다는 방향을 제시한 바 있다. 문제는 현행 제도가 이러한 활용을 충분히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효율적인 가업승계는 개별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창업주 세대의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는 국가경제의 지속성과도 연결된다. 가업승계를 둘러싼 복합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신탁이 제대로 활용될 수 있도록 후속 입법과 제도 정비가 함께 논의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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