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증조부께서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하신 후 한양에서 최초로 양의원을 개원하셨고, 고종 황제를 진료하셨어요." 방송이 예정된 드라마 홍보를 위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4대째 의사 집안이라고 자랑하기 위해 했던 한 마디가 세상을 뒤집어놓았습니다. 배우 하영(본명 안하영)의 이야기입니다.

하영이 구체적으로 증조부의 행적을 언급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구한 말 일본에서 의술을 배워 서울에서 처음으로 서양식 병원을 개원하고, 왕실을 출입했던 안씨 성의 의사는 역사 기록에 안상호 단 한 명뿐이었습니다. 안상호는 친일 의혹 행적으로 인해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었지만, 이를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자랑스럽게 언급한 하영의 발언으로 논란이 커졌습니다.
사실 그간 하영은 세련된 엘리트 이미지로 광고계의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하영은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거쳐 미국 3대 예술대로 꼽히는 명문 SVA(School of Visual Arts)에 진학했습니다. 엘리트 미술 교육을 받아왔던 하영은 뒤늦게 배우의 꿈을 꾸고 27살이던 2019년 KBS 2TV '닥터 프리즈너'로 데뷔했습니다.
이후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아오던 하영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중증외상센터'에서 간호사 천장미 역을 맡으면서 주목받게 됩니다. 하영이 캐스팅될 때까지만 하더라도 천장미 역할의 극 중 비중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 관계자는 "하영이 자신에게 잘 맞는 배역을 만났고, 그걸 잘 소화해 주목받은 케이스였다"며 "실제로 촬영장 평판도 좋았다"고 전했습니다.
이후 하영을 찾는 곳은 늘어났습니다. 올해 글로벌 신드롬을 일으킨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참교육'에서 주인공 나화진의 약혼녀 최가윤 역을 맡아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 기세를 몰아 지난 8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이런 엿같은 사랑'에서는 배우 정해인과 나란히 주인공으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광고계에서도 러브콜이 이어졌습니다. 최근 논란 이후 광고 콘텐츠를 비공개해 주목받았던 의류 브랜드 아티드, 삼성 아트 TV 모두 지난해 '중증외상센터' 공개 이후 선보인 광고들입니다.
특히 하영이 광고 모델로 차별화된 부분은 단순히 예쁘고 세련된 이미지뿐 아니라 그의 엘리트 이력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해 아시아 최대 아트페어 아트 바젤 홍콩에 삼성 아트 TV 도슨트로 하영이 참여한 것을 두고 당시 "효과적 마케팅"이란 반응이 나왔던 이유입니다.

하영은 아트 바젤 홍콩에서 삼성 아트 TV 도슨트로 사야 울파크, 마크 데니스, 쥘드 발랭크드, 이건용 작가 등 화면에서 소개되는 작품들과 작가들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지 디지털 큐레이터와의 인터뷰도 영어로 통역 없이 진행했습니다.
이처럼 '광고계 블루칩'으로 떠오르던 하영은 지난 7일 KBS 2TV 예능 '옥탑방의 문제아들'에 출연해 문제의 발언을 하면서 단숨에 논란의 주인공으로 전락했습니다. 기본적으로 호감도가 중요한 광고업계에서 하영에 대한 거리두기에 나선 건 당연한 수순입니다.
논란 이후 아티드 측은 하영과의 전속계약은 지난해 만료됐고, 현재 노출된 자료 역시 브랜드 히스토리 목적의 아카이빙 콘텐츠였다고 설명했습니다. 지난해에 촬영한 영상을 비공개로 전환한 것에 대해서는 "불필요한 오해 방지"라고 부연했습니다.
광고가 소비자의 제품 선택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질문은 마케팅 전략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돼왔고 단순한 브랜드 노출을 넘어 검색량 증가, 매출 성장, 신규 가입자 확대 등 구체적인 지표로 광고 모델 효과가 확인되는 사례가 다수 존재합니다. 특히 신뢰도 높은 유통 채널을 보유한 기업이 대중적 인지도가 있는 모델을 결합할 경우, 브랜드 인지도 제고뿐 아니라 실제 구매 전환으로 이어지는 경향은 수차례 관찰돼왔습니다.
하영의 자랑으로 '파묘'된 증조부 안상호는 일본에서 의학을 배우고, 한국인 최초로 일본에서 의술개업시험에 합격한 인물입니다. 서울 종로에서 병원을 개업한 후, 궁을 왕래하는 '전의'로 활동했습니다. 안상호는 1918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인터뷰를 통해 "나는 일본인과 같아 옷도 일본 의복을 입고 아내도 일본 여자다" 등의 발언을 했습니다. 이완용 등이 소속된 대표적 친일 단체인 대정친목회 평의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사실도 이번에 알려졌습니다.
문제는 하영의 발언 태도와 이후 해명 과정에서 불거졌습니다. 조상은 개인의 의지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영은 '4대째 의사 집안'이라는 타이틀을 자랑스러워하며 논란의 여지가 있는 조상을 언급했습니다. 게다가 소속사도 안상호의 행적에 대한 비판이 불거진 초기에 "사실무근"이라고 대응하는 자충수를 둬 논란과 반감을 키웠습니다.
며칠째 이어지는 논란에 하영은 '이런 엿같은 사랑'으로 진행하는 인터뷰 일정도 취소했고, 지난 12일에는 자필 사과문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에 게재했지만 여전히 반감이 남아있는 상황입니다.
하영을 다시 브랜드 모델로 만날 수 있을까요? 당분간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하영은 '이런 엿같은 사랑' 외에도 SBS 새 드라마 '승산있습니다'와 '중증외상센터 시즌2'에도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상태입니다. 이 작품들을 통해 하영이 논란을 딛고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다시 광고주 선택을 받을 수 있을지 지켜볼 일입니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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