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한국 창작뮤지컬의 새 역사를 쓴 작품이다. 2024년 11월 뉴욕 벨라스코 극장에서 막을 올린 이 작품은 작년 토니상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비롯해 극본상, 음악상 등 주요 6개 부문을 석권했다. 스토리와 음악, 연출뿐만 아니라 영상과 실제 무대 장치를 촘촘하게 결합한 무대가 작품 속 미래 세계를 설득력 있게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화려한 무대를 만든 제작진 가운데엔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하는 김희경 영상디자이너도 있다. 그는 애니메이터로 참여해 무대에 등장하는 영상 디자인을 맡았다. 미래 서울의 풍경부터 제주도로 향하는 길, 로봇의 머릿속을 시각화한 장면까지 그의 손을 거쳤다. 오는 9월 개막하는 국립극단 공연 ‘역행기’에 영상디자이너로 참여하는 그를 최근 만났다.
“무대 기술이 발전하면서 영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무궁무진하게 많아지고 있습니다. 영상을 중요하게 활용하지 않는 대형 뮤지컬은 거의 없을 정도죠.”
김 디자이너는 중앙대에서 연극학과 연출을 전공한 뒤 미국 텍사스대 오스틴에서 공연 디자인·프로덕션을 공부하며 라이브 퍼포먼스 통합미디어 전공으로 예술학 석사(MFA) 학위를 받았다. 이후 ‘어쩌면 해피엔딩’뿐 아니라 ‘원스 어폰 어 원 모어 타임’ ‘레드우드’ ‘리얼 위민 해브 커브스’ ‘더 퀸 오브 베르사유’ 등 여러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참여했다.

그의 말처럼 뮤지컬과 연극에서 영상이 차지하는 영역은 갈수록 넓어지고 있다. 과거에는 무대 뒤편 스크린에 배경을 띄우는 정도였다면, 최근에는 LED 패널과 프로젝션을 무대 장치와 결합해 다채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움직이는 무대 장치의 위치를 추적해 그 위에 영상을 맞춰 투사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가령 뮤지컬 ‘렘피카’에선 시간의 흐름에 따른 렘피카의 여정을 묘사하는 데 영상이 큰 역할을 한다. 렘피카의 여러 작품이 무대 위에 영상으로 펼쳐지면서 무대 자체가 하나의 갤러리처럼 완성되기도 한다. 뮤지컬 ‘드라큘라’에선 회전하는 9개 기둥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추적해 각각의 움직이는 면에 맞춰 영상을 투사한다. 김 디자이너는 “영상을 활용하는 창의적인 시도가 계속 나오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 디자이너가 공연 영상을 전문적으로 파고든 것도 이런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다. 조연출로 일하던 2016년께 연극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을 본 것이 결정적이었다. 프로젝션이 단순한 배경에 머물지 않고 배우와 무대 장치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공연에 특화된 영상 작업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고 했다.
미국에서 활동 영역을 넓히는 데는 그가 익힌 3차원(3D) 기술이 강점으로 작용했다. 3D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무대와 세트를 3D로 구현하거나 미디어 서버가 인식할 수 있도록 모델을 제작하는 작업까지 익혔다. 무대의 모습을 공연 전 컴퓨터상에서 미리 구현하는 작업에도 3D 기술이 쓰인다. 그는 “당시 3D까지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했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과의 인연은 작품이 브로드웨이 진출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시작됐다. 브로드웨이 극장에 작품을 제안하기 위해 무대 모습을 미리 시각화하는 데 참여했고, 실제 공연이 결정되자 애니메이터로 제작진에 합류했다. 브로드웨이 버전은 처음부터 무대를 새로 설계했다. 천장과 바닥 등 무대 곳곳에 LED 장치를 배치했고, 김 디자이너는 그 위에 들어갈 콘텐츠 제작에 참여했다. 극 중 서울에서 제주도로 이동하는 길을 영상으로 표현하고, 모텔 엘리베이터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듯한 장면을 구현하기도 했다.
그가 추구하는 공연 영상은 무엇일까. 화려한 기술을 관객에게 과시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크게 티가 나지 않아야 좋은 영상’이라는 생각이다. 영상 역시 조명처럼 빛을 사용하는 만큼 혼자 도드라지기보다 배우와 무대, 조명, 음향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업할 때는 배우들의 리허설 영상을 곁에 띄워놓고 음악과 움직임을 계속 확인한다.
“조명과 음향, 무대와 같이 호흡하는 영상이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해요. 영상만 눈에 들어온다면 오히려 공연 전체에서는 어색할 수 있죠.”

김 디자이너가 최근 집중하고 있는 작품은 국립극단의 신작 ‘역행기’다. 수메르 신화의 이난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주인공 ‘인안나’가 지하 세계로 계속 내려가며 과거를 마주하는 과정을 그린다. 제목의 ‘역행’에는 아래로 내려간다는 의미와 시간을 거슬러 자신의 과거를 되짚는다는 의미가 함께 담겨 있다.
영상은 이 작품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안나가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달라지는 공간을 영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특히 인안나가 향하는 ‘키갈’이라는 공간이 하나의 등장인물처럼 주인공에게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을 영상으로 구현할 예정이다.
“영상을 단순히 장소를 보여주는 배경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 작품에서는 완전히 달라요. 영상이 주는 메시지가 일차원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공을 들이고 있어요.”
최한종 기자/사진=임형택 기자 onebel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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