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인사이트] 신호의 경영, SK하이닉스는 왜 40조원을 태우나

입력 2026-08-23 17:25   수정 2026-08-24 00:59

[비즈니스 인사이트] 신호의 경영, SK하이닉스는 왜 40조원을 태우나


SK하이닉스가 19일 이사회를 열어 40조원 규모의 자사주를 사들여 전량 소각하기로 했다. 국내 상장사 역사상 최대 규모의 자사주 소각이다. 발행주식의 3.3%에 해당하는 물량을 20일부터 석 달간 사들인 뒤 없앤다. 애초 ‘2025~2027년 누적 잉여현금흐름(FCF)의 50% 범위 내’로 잡았던 주주환원 상한선도 이번에 아예 없앴다. FCF는 기업이 영업활동으로 벌어들인 현금에서, 사업을 유지·확장하는 데 필요한 설비투자(캐펙스) 등을 다 쓰고도 남는 현금을 말한다. 조항을 ‘50% 이상’으로 바꿔, 상한이 아니라 하한을 제시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정부가 저PBR(낮은 주가순자산비율) 기업의 밸류업을 유도해 온 흐름 속에서, 실적으로 이미 검증된 대형주가 스스로 가장 화끈한 카드를 꺼냈다.
◇소각으로 알린 ‘저평가’ 자신감
이 결정을 이해하는 열쇠로는 1986년 미국 경제학자 마이클 젠슨이 내놓은 ‘잉여현금흐름의 대리인 비용’ 이론이 있다. 그는 기업이 투자할 곳을 다 채우고도 현금이 남아돌 때, 그 돈을 주주에게 돌려주지 않고 쥐고 있으면 오히려 위험해진다고 봤다. 경영진이 그 현금을 무리한 인수합병이나 비효율적인 사업 확장에 써버릴 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주인(주주)과 대리인(경영진) 사이에 이해가 어긋나는, 이른바 ‘대리인 문제’가, 정작 회사가 잘 나갈 때 더 커진다는 역설이다.

젠슨은 특히 석유업계를 예로 들며, 현금이 넘치는 기업일수록 무리한 투자로 주주 가치를 갉아먹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애플이 2010년대 이후 매년 수백억달러 규모로 자사주를 매입한 것도 같은 논리로 설명된다. SK하이닉스의 2분기 말 순현금은 약 69조원. 스스로 “사업 경쟁력과 현금창출력이 주가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라고 밝힌 것도 이 이론과 정확히 포개진다. 곳간이 차오른 지금, 그 돈을 어떻게 쓸지에 대한 신뢰를 시장에 보여줘야 할 시점이다.

1977년 경제학자 스티븐 로스가 제시한 신호 이론을 보자. 경영진은 회사의 진짜 가치를 시장보다 훨씬 잘 안다. 자사주를 사서 태워 없앤다는 것은 “지금 주가가 우리 회사의 진짜 가치보다 싸다”는 확신이 없다면 하기 힘든 결정이다. 배당은 매년 반복해서 줘야 하니 함부로 늘리기 어렵지만, 자사주 소각은 회사가 가장 자신 있을 때 던지는 신호다. 발행주식 자체가 영구히 줄어드니 이후 주당순이익(EPS)이 자동으로 개선되는 효과까지 뒤따른다. 상한을 없애고 하한만 남긴 이번 조치는, 시장에 보내는 신호치고는 꽤 단호해 보인다. 경영학에서는 이런 신호가 강력할수록 모방하기 어렵다는 점도 함께 짚는다. 실적이 뒷받침되지 않는 기업이 무리하게 자사주를 태우면 재무 건전성 훼손이라는 역효과를 불러오기에, 아무 기업이나 흉내 낼 수 있는 카드는 아니다.
◇주주환원과 투자 사이 ‘균형’
시장의 시선은 다음 장면을 연상하고 있다. 순현금 곳간이 두둑한 삼성전자도 21일 창사 이후 최대 주주 환원 정책을 발표했다. 원화 가치가 가파르게 오르는 시점과 맞물려, 대형 자사주 소각이 외국인 자금을 주식시장으로 다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통상 자국 통화가 강세면 외국인은 환차익까지 노리고 국내 주식을 더 사들이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에 대형주의 자사주 소각까지 겹치면 수급에 이중으로 우호적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

다만 경영 전략 차원에서는 이 결정을 무조건적인 모범 답안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짚어야 할 함정도 있다. 젠슨의 이론이 겨냥한 것은 ‘투자할 곳을 다 채우고도’ 남는 현금이었다. 반도체처럼 3년 주기로 최신 공정에 재투자해야 살아남는 업종에서는, 자칫 주주환원에 힘을 쏟다가 다음 기술 전환기에 필요한 실탄이 부족해질 위험이 있다. SK하이닉스가 순현금 100조원이라는 목표치를 별도로 제시하며 재무 건전성을 함께 강조한 것도 이런 균형을 의식한 조치로 읽힌다. 경영진은 결국 ‘얼마나 남는 돈을 돌려줄 것인가’가 아니라 ‘얼마가 진짜로 남는 돈인가’를 정확히 가려낼 안목이 필요하다.

이번 결정이 다른 기업에 던진 메시지는 자사주를 무조건 사서 소각하라는 것이 아니다. 곳간에 쌓인 현금의 성격을 정직하게 들여다보고 그에 맞는 자본 배분 원칙을 시장에 명확히 설명하라는 것이다. 이론은 방향을 알려줄 뿐, 그 방향으로 얼마나 갈지 결정하는 것은 결국 각 기업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곳간에 쌓인 현금을 어떻게 쓰느냐가, 기업의 미래뿐 아니라 시장 전체의 온도까지 바꿀 수 있다는 걸 이번 결정이 보여줬다. 정부는 주가의 냉·온탕을 발생시키지 말고 SK하이닉스의 주주환원 전략처럼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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