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 지키는 비만신약…한미약품, 3.2조 수출

입력 2026-08-24 17:54   수정 2026-08-25 10:11

한미약품이 단일 신약 후보물질 기준으로 국내 제약산업 역대 최대 기술수출 기록을 새로 썼다.

한미약품은 24일 미국 바이오기업 제넨텍에 신약 후보물질 HM17321 개발권을 최대 23억달러(약 3조2000억원)에 이전하는 계약을 맺었다고 공시했다. HM17321은 ‘근육을 살리면서 지방을 빼주는’ 비만 치료 후보물질이다. 계열 내 최초 신약(퍼스트 인 클래스)을 목표로 지난해 11월부터 미국에서 사람 대상 초기 임상(1상)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 계약으로 제넨텍은 한국을 제외한 세계 독점 개발·상업화 권리를 확보했다. 제넨텍은 스위스 로슈그룹의 100% 자회사로 후속 2상도 맡는다.

계약 직후 한미약품이 받는 선급금은 거래 규모의 8.3%에 이르는 1억9000만달러다. 기술수출 금액과 선급금 모두 국내 제약사 단일 물질 계약 사상 최대다. 최인영 한미약품 부사장(미래성장부문장)은 “HM17321은 비만약 시장 패러다임을 바꾸는 ‘게임체인저’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날 유가증권시장에서 한미약품 주가는 가격제한폭(29.96%)까지 상승한 54만원에 거래를 마쳤다. 지주사인 한미사이언스 주가도 25.7% 오른 5만6500원에 마감했다.
'임주현의 뉴한미' R&D로 기술수출 새 역사
살은 빠지고 근육은 보존하는 '꿈의 비만약' 후보 물질 개발
‘포스트 글루카곤유사펩타이드(GLP)-1을 찾자’. 노보노디스크 ‘위고비’와 일라이릴리 ‘마운자로’가 비만약 전성시대를 연 뒤 빅파마(글로벌 제약사)가 내세운 공통 목표다. 한미약품이 3조원 규모 대형 기술수출 계약을 맺은 데엔 이 같은 시장 상황이 반영됐다. 트렌드에 발 빠르게 대응하면서 뚝심 있게 연구개발(R&D)을 지원한 개발 전략이 통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근육 보존’ 차별화로 성과
위고비와 마운자로는 음식을 먹을 때 소장에서 분비되는 인크레틴 호르몬을 흉내 낸 약이다. 비교적 빠르게 체중을 줄여주지만, 이 과정에서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근육까지 줄어든다. 기초대사량이 떨어져 약을 끊으면 체중이 불어나는 요요 현상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HM17321은 인크레틴 대신 근육 생성을 자극하는 호르몬(UCN2)을 흉내 냈다. 과거 글로벌 제약사는 이 물질을 활용해 근육이 많은 심장을 자극하는 심장병 신약 개발에 집중했다. 한미약품은 ‘비만’으로 눈을 돌렸고, 살을 빼는 기능과 근육 재생 기능을 강화해 체중 감량과 근육 보존을 함께 실현하는 계열 내 최초 신약(퍼스트 인 클래스) 개발에 성공했다. 보리스 자이트라 로슈 기업사업개발 총괄은 “지방량을 선택적으로 줄이면서 근육량과 근기능을 개선하는 차별화된 치료 전략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했다.

국산 신약 후보물질을 기술수출할 때 선급금은 전체의 5% 정도인데, 이번 계약은 8%를 넘었다. 계약금과 비슷한 선급금은 신약 개발에 실패해도 반환 의무가 없어 약물 가치가 높고 경쟁이 치열할수록 비중이 커진다. 로슈가 HM17321의 혁신 가치를 그만큼 높게 평가했다는 의미다.

업계에선 로슈가 자체 보유한 다른 비만신약 후보물질과 결합해 시장성을 높이는 ‘시너지 효과’를 내려 할 것으로 전망한다. 로슈는 2023년 카못테라퓨틱스를 인수하면서 인크레틴 계열 비만 신약 ‘에니세파타이드(CT-388)’를 확보했다. 인크레틴 계열보다 감량 효과가 큰 ‘아밀린 유사체’ 계열 신약 후보물질 ‘페트렐린타이드’도 질랜드파마로부터 도입했다. 이들과 HM17321은 모두 같은 소재(펩타이드)다.

HM17321은 한미약품이 개발명과 작용 방식을 공개하기 전인 2023년부터 글로벌 투자 시장에서 문의가 잇따른 ‘유망주’다. 이번 인수전엔 비만약을 보유한 여러 글로벌 제약사가 뛰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최인영 부사장은 “HM17321을 가장 잘 키워줄 기업, 미래 성장성이 가장 높은 기업을 택했다”며 “높은 선급금은 HM17321이 ‘모두가 갖고 싶어 하는 약’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오너 리더십’ 재평가 기대
이번 성과로 한미약품의 오너 리더십도 재평가받게 됐다. 2020년 임성기 창업주가 갑자기 별세한 뒤 업계에선 “한미약품의 신약 개발 동력이 끊어질 것”이란 우려가 계속 나왔다. 한미약품의 R&D를 이끌던 ‘올드맨’이 잇달아 회사를 떠난 데다 오랜 기간 경영권 분쟁까지 이어지면서다.

HM17321은 창업주 장녀인 임주현 한미사이언스 부회장이 설계하고 추진한 비만·대사질환 신약 프로젝트(H.O.P)의 핵심 물질이다. 오는 10월 출시를 앞둔 첫 국산 GLP-1 ‘에페’, 3중 작용 비만약 ‘HM15275’ 등도 마찬가지다. 회사 관계자는 “새로운 시도가 필요한 데다 결과를 내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신약 개발을 단기에 성과를 내야 하는 전문 경영인이 이끄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임 부회장이 일선에서 계약 과정을 진두지휘하는 등 큰 역할을 했다”고 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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