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과 싸운 4000년, 그리고 ‘아직은’ [EDITOR's LETTER]

입력 2026-08-30 05:08  



우리는 인생에서 생각보다 자주 암과 마주합니다. 나 자신에게서, 가족에게서, 가까운 지인에게서입니다. 그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과 함께 평소에는 별생각 없이 밀어두었던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를 비로소 정면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최근 암 치료 역사에 기록될 만한 소식이 하나 전해졌습니다. 모더나와 머크가 개발 중인 개인맞춤형 mRNA 암치료제 ‘인티스메란’이 흑색종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 3상에서 주요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한경비즈니스>에서는 이번 호 커버스토리로 이 주제를 깊이 다뤄봅니다. 그래서 인류가 암과 벌여온 길고 처절한 전쟁의 역사를 생각해봤습니다.

기원전 1600년경 작성된 고대 이집트의 의학서 ‘에드윈 스미스 파피루스’에는 유방에 생긴 종양에 대한 인류 최초의 기록 가운데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 당시 의사는 종양의 모양과 촉감을 세밀하게 기록한 뒤 마지막에 짧은 문장을 남겼습니다. “치료법 없음(There is no treatment).”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근대 의학이 등장하면서부터입니다. 19세기 말 미국의 외과의사 윌리엄 홀스테드는 유방암을 치료하기 위해 유방은 물론 가슴 근육과 겨드랑이 림프절까지 광범위하게 제거했습니다. 암보다 더 넓게, 더 깊게 잘라내면 이길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였습니다. 비슷한 시기 빌헬름 뢴트겐이 X선을 발견했고, 불과 몇 년 뒤 의사들은 X선으로 피부암을 치료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은 처음으로 칼 이외의 무기를 갖게 됐습니다.

다음 무기는 뜻밖에도 전쟁터의 독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과학자들은 머스터드가스가 골수와 백혈구를 파괴한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그렇다면 빠르게 증식하는 암세포도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질소 머스터드 계열 항암제가 탄생했습니다. 인간은 암세포를 직접 죽이는 ‘화학전’을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우연도 인간의 편이 됐습니다. 1965년 미국 미시간주립대의 바넷 로젠버그는 전기장이 세포 분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려고 백금 전극을 넣은 배양액에 대장균을 키웠습니다. 놀랍게도 대장균은 성장하면서도 분열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전기의 효과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2년간 추적한 끝에 원인은 전기가 아니라 전극에서 녹아 나온 백금 화합물이라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여기서 탄생한 약이 ‘시스플라틴’입니다.

숲속의 나무 한 그루도 강력한 무기가 됐습니다. 1960년대 미국 국립암연구소(NCI)는 자연에서 항암 물질을 찾기 위해 수만 개의 식물과 자연물 표본을 모았습니다. 그중 1962년 미국 워싱턴주의 태평양 주목나무 껍질에서 특별한 성분이 발견됐습니다. 암세포가 분열할 때 필요한 미세소관의 작동을 방해하는 파클리탁셀, 훗날의 ‘탁솔’입니다. 탁솔은 난소암과 유방암을 넘어 폐암과 췌장암 등 다양한 암 치료에 사용되는 대표적인 항암제가 됐습니다.

그러나 암과의 전쟁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암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였습니다. 과거에는 암세포와 정상세포를 함께 공격했습니다. 2001년 등장한 글리벡은 달랐습니다. 만성골수성백혈병에서 발견되는 ‘필라델피아 염색체’가 만들어내는 특정 단백질만 골라 공격했습니다. 한때 치명적이었던 병을 장기간 관리할 수 있는 질환으로 바꿨습니다. 암 치료는 무차별 폭격에서 정밀타격의 시대로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다음에는 아예 인간의 면역체계를 무기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임스 앨리슨과 혼조 다스쿠는 우리 몸의 T세포에 CTLA-4와 PD-1이라는 일종의 ‘브레이크’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암세포는 이 브레이크를 이용해 면역계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브레이크를 풀면 어떻게 될까. 이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발상은 면역관문억제제라는 새로운 항암제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2018년 두 과학자는 이 연구로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습니다. 이제 인간은 암을 직접 공격하는 데서 나아가 자신의 면역계가 암을 공격하도록 만드는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이번 mRNA 암백신은 바로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같은 장기에 생긴 암이라고 모두 같은 암으로 취급하던 시대에서, 같은 사람에게 생긴 암조차 유전적 특성에 따라 다르게 상대하는 시대로 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인류는 암과의 전쟁에 얼마나 많은 힘을 쏟고 있을까요. 최근 ‘랜싯 온콜로지’에 발표된 분석을 보면 2016년부터 2023년까지 세계 각국 정부와 공익재단이 지원한 암 연구과제만 10만7955건, 투자액은 514억달러에 달했습니다. 여기에는 글로벌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투입한 막대한 연구개발비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민간 연구까지 들여다보면 암의 비중은 더 선명해집니다. IQVIA에 따르면 2025년 세계 제약업계에서 새로 시작된 임상 1~3상 시험의 38%가 암 치료제 연구였습니다. 거의 임상시험 10건 중 4건이 암과 관련된 셈입니다. 미국 국립암연구소 한 곳의 2026 회계연도 예산만도 73억달러이고 이 가운데 4억달러 이상이 임상시험 네트워크에 투입됩니다. 암은 의학의 한 분야를 넘어 정부와 대학, 병원, 바이오벤처와 글로벌 제약사가 거대한 생태계를 이루며 도전하는 인류 최대의 연구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가 됐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암을 완전히 정복하는 일이 우리가 은하계를 자유롭게 누비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암은 외부에서 침입한 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세포가 변해 생기는 병입니다. 그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통제한다는 것은 결국 생명이 작동하는 원리를 거의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암과 인류가 벌이고 있는 전쟁은 단순한 의학의 역사가 아닙니다. 전혀 관계없어 보이던 발견을 연결하고, 실패한 실험을 다음 세대가 이어받고, 정부가 긴 시간을 견디는 연구에 돈을 대고, 기업이 그것을 제품으로 만들어 수많은 환자에게 전달한 혁신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기업이 여기서 배워야 할 것도 어쩌면 거창한 ‘정복’의 정신이 아닐지 모릅니다. 답이 없는 문제를 작은 문제로 나누고, 실패를 버리지 않고 축적하며, 한 세대가 찾지 못한 답을 다음 세대에 넘겨주는 끈기입니다.

4000년 전 이집트의 의사는 암 앞에 “치료법 없음”이라고 적었습니다. 인류는 그 문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끊임없이 한 단어를 덧붙여 왔습니다.

“아직은.”

이홍표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이홍표 기자 hawll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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