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2% '천사의 몫'…88년 묵은 위스키 어떻게 살아남았나 [권용훈의 트렌드워치]

입력 2026-09-03 13:00   수정 2026-09-03 13:09

매년 2% '천사의 몫'…88년 묵은 위스키 어떻게 살아남았나 [권용훈의 트렌드워치]



“매년 2%씩 증발한다면 88년 뒤에는 술이 남아 있을 수 있을까.”

발베니가 최근 서울 성수동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 숙성된 싱글몰트 스카치위스키 ‘1931 컬렉션 88년’을 처음 공개하면서 생긴 궁금증이다. 이 위스키는 1931년 오크통에 들어가 2019년까지 무려 88년을 버텼다. 마지막에 남은 원액으로 만든 제품은 단 17병. 생존 비결 중 하나는 숙성 말년 더 작은 오크통으로 ‘이사’시킨 것이었다.

위스키는 오크통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조금씩 사라진다. 나무통은 유리병처럼 완전히 밀폐돼 있지 않다. 숙성하는 동안 물과 알코올이 나무를 통해 공기 중으로 빠져나간다. 업계에서는 이를 천사가 술을 가져간다는 뜻으로 ‘엔젤스 셰어(Angel's Share·천사의 몫)’라고 부른다. 스코틀랜드에서는 통상 연간 1~2% 안팎의 원액이 증발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2%×88년=176%’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매년 최초 원액의 2%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해 남아 있는 원액에서 다시 일정 비율이 증발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500L를 넣고 매년 정확히 2%씩 줄어든다고 가정하면 첫해에는 490L가 남는다. 이듬해에는 500L가 아니라 490L의 2%인 9.8L가 증발해 480.2L가 된다. 같은 방식으로 88년을 계산하면 약 84.5L, 최초 원액의 16.9%가 남는다.

실제 위스키 숙성은 이 계산보다 훨씬 복잡하다. 연간 2%는 평균적인 표현일 뿐 증발률은 매년 일정하지 않다. 오크통의 크기와 상태, 저장고의 온도와 습도, 공기의 흐름과 캐스크가 놓인 위치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같은 날 만든 원액을 같은 종류의 통에 넣어도 수십 년 뒤 남는 양과 알코올 도수가 달라질 수 있는 이유다.

발베니 88년산은 그냥 창고에 넣어두고 기다려 만든 술도 아니다. 발베니의 수기 기록에 따르면 원액은 1931년 3월 5일 스페인 헤레즈에서 들여온 유러피안 오크 리필 셰리 버트 ‘캐스크 239번’에 채워졌다. 당시 실제 충전량은 공개되지 않았다.

이 원액은 스코틀랜드 더프타운의 발베니 저장고에서 80년 넘게 숙성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문제가 생겼다. 원액은 계속 줄어드는데 오래된 대형 셰리 버트에 그대로 보관할 경우 통의 손상이나 추가 증발로 남은 술마저 모두 잃을 위험이 커진 것이다.



결국 발베니는 남은 원액을 더 작은 캐스크로 옮겼다. 켈시 맥케크니 발베니 몰트 마스터는 최근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원래 버트에 그대로 뒀다면 모든 것을 잃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위스키를 더 오래 묵히기 위해 오히려 ‘작은 집’으로 옮긴 셈이다.

작은 통으로 옮긴 뒤에도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맥케크니는 2019년 원액의 향과 맛을 확인한 뒤 더 이상 숙성시키지 않기로 결정했다. 당시 남은 원액을 모두 병에 담았더니 나온 것이 단 17병이었다. 여기에 명확한 ‘마지노선’도 있다. 스카치위스키는 병입할 때 알코올 도수가 최소 40% 이상이어야 한다. 아무리 귀한 원액이라도 90년, 100년을 채우겠다며 기다리다 40% 아래로 내려가면 법적으로 스카치위스키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

88년산의 진짜 적은 증발량만이 아니다. 더 오래 숙성할수록 알코올 도수를 지키기도 어려워진다. 오크통에서는 물과 알코올이 동시에 증발하지만 빠져나가는 속도가 같지 않다. 스코틀랜드처럼 비교적 서늘하고 습한 지역에서는 장기 숙성 과정에서 알코올 도수가 낮아지는 경우가 많다. 발베니 88년산의 최종 도수는 43.2%였다. 스카치위스키의 법정 최저선보다 불과 3.2%포인트 높다.



오래 숙성한다고 맛도 계속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원액은 줄어들고 도수는 변한다. 반대로 오크에서 탄닌과 나무 성분은 계속 스며든다. 지나치게 오래 두면 나무 맛이 강해져 위스키 특유의 균형이 무너질 수도 있다. 숙성을 얼마나 오래 하느냐 못지않게 ‘언제 멈추느냐’가 중요한 이유다.

그래서 88년이라는 숫자는 2019년에 멈췄다. 위스키는 오크통을 떠나 유리병에 들어가는 순간 더 이상 숙성 연수가 늘어나지 않는다. 발베니는 2019년 병입한 17병을 곧바로 판매하지 않았다. 서늘하고 어두운 잠금 공간에 보관했고 열쇠까지 별도의 금고에서 관리했다. 제품을 세상에 내놓을 방법을 고민하다 올해 현대미술가 다니엘 아샴과 ‘1931 컬렉션’을 기획해 7년 만에 공개했다.

세계 최고령이라는 기록도 이 때문에 나온다. 종전 최고 기록은 고든앤맥파일이 지난해 출시한 글렌리벳 85년산이었다. 발베니가 88년으로 이 기록을 3년 늘렸다. 단순히 오래된 병이 아니라 실제 오크통 안에서 보낸 숙성기간을 기준으로 한 세계 최고령 싱글몰트 스카치위스키다.

발베니 88년산은 이 조건을 모두 통과했다. 1931년 오크통에 들어간 원액을 세대를 달리한 장인들이 관리했고, 사라질 위험이 커지자 작은 캐스크로 옮겼다. 그렇게 88년을 버틴 뒤 남은 것은 17병이었다.세계 최고령이라는 기록보다 이 위스키가 희귀한 진짜 이유다. 88년 동안 ‘천사의 몫’을 내주면서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사라지기 전에 인간이 숙성을 멈춰 세운 결과물인 셈이다.

권용훈 기자 fac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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