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그레코의 성모가 유난히 우아한 이유가 있다

입력 2026-09-09 18:33   수정 2026-09-10 00:24


엘 그레코(1541~1614)의 그림은 특이하다. 등장인물의 몸은 실제보다 길쭉하게 늘어져 있고, 색(色)도 실제와 다른 빛깔을 띠고 있다. 자연을 눈에 보이는 대로 옮기는 대신 화가의 상상력을 앞세워 모양과 색을 과장했던 당대의 이 같은 화풍을 ‘매너리즘’이라고 한다.

매너리즘 작품들 가운데서도 엘 그레코의 그림은 유독 형태와 색의 변형이 심한 편이다. 그 덕분에 그의 작품은 독특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엘 그레코의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로, 그리스의 크레타섬에서 태어났다. 그리스 정교회의 성화(聖?)인 이콘을 그리는 화가로 출발한 그는 이탈리아에서 그림을 공부한 뒤 1577년 스페인 톨레도에 자리를 잡았다. ‘엘 그레코’, 즉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의 스페인어 별명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톨레도에서 그는 초상화와 집에 걸 작은 종교화(?)를 그려 성직자와 부유한 시민에게 판매했다. 오는 22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개막하는 ‘스페인 미술 500년: 빛과 어둠의 연대기’에 나오는 ‘성(聖)가족’도 이런 그림이다. 가로 87.6㎝, 세로 106㎝ 크기의 이 그림은 집 안의 기도 공간에 걸어둘 용도로 제작됐다.

그림에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요셉이다. 배경에는 잿빛 구름과 파란 하늘이 그려져 있다. 예수에게 젖을 물리는 성모의 어깨 너머로 요셉이 아기를 내려다보는 구도다. 종교적으로 이 같은 그림은 ‘성모가 아기를 먹이듯 교회는 신자들을 먹인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성모의 머리를 덮은 흰 레이스 천은 만틸라(mantilla)로, 스페인 여성들이 성당에 갈 때 쓰던 머릿수건이다. 요셉은 짙은 갈색 머리와 수염을 기른 한창 나이의 남자로 그려졌다. 옛 성화에서 요셉이 흔히 백발 노인으로 그려진 것과 대조적이다. 엘 그레코는 자신이 살던 톨레도의 거리에서 마주칠 법한 젊은 부부의 모습처럼 성모와 요셉을 그렸다. 이 때문에 성모는 더욱 인간적이고 자애로운 이미지로 느껴진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성모의 우아함은 얼굴을 일부러 길게 늘린 덕분이다. 코와 턱이 길어지면 성숙하고 침착한 인상이 되고, 표정 변화가 작게 느껴져 고요함이 느껴진다. 이는 엘 그레코가 초기에 그린 이콘의 얼굴 표현법과 맞닿아 있다. 이 작품의 얼굴은 엘 그레코가 그린 여성의 얼굴 중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다.

엘 그레코의 그림은 그가 죽은 뒤 수백 년간 잊혔다. 과장된 색과 형상이 기이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그의 파격과 예술성이 뒤늦게 재조명되면서, 오늘날에는 가장 독특하고 매력적인 서양미술 거장 중 하나로 꼽히게 됐다. 파블로 피카소가 가장 존경했던 선배 예술가 중 한 명이다. 전시는 내년 1월 20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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