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와인은 가성비?…프랑스 '와인 명가'가 작정하고 만들었다 [씬메이커]

입력 2026-09-10 21:01   수정 2026-09-10 21:02

칠레 와인은 가성비?…프랑스 '와인 명가'가 작정하고 만들었다 [씬메이커]


프랑스 보르도 1등급 와인 '샤토 무똥 로칠드'를 보유하고 미국 '오퍼스 원', 칠레 '알마비바'를 탄생시킨 로칠드 가문은 세계 와인 산업에서 프리미엄 와인의 기준을 만들어온 명가 중 하나다. 그런 로칠드가 또 하나의 명품 와인을 한국에 선보인다. 30년간 공들여온 칠레에서 테루아와 품종을 세분화하고 프랑스식 양조 노하우를 접목해 생산한 프리미엄 와인이다.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좋은 와인'이라는 칠레의 익숙한 이미지를 넘어 고유한 맛에 우아함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에스쿠도 로호의 총괄 와인메이커 곤잘로 카스트로(사진)는 "칠레에서 프랑스 와인을 복제하려는 것이 아니다. 칠레의 테루아와 과실의 생동감에 로칠드가 추구하는 우아함을 결합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프리미엄 와인 지형 바꿔온 명가, 로칠드
'로칠드'는 와인 산업에서 단순한 브랜드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필립 드 로칠드 남작은 1920년대부터 프랑스 보르도 와인 산업의 변화를 이끌었다. 1924년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와인을 샤토에서 직접 병입하는 방식을 주도했고, 이후 와인 라벨에 예술을 접목했다. 피카소, 샤갈, 앤디 워홀, 살바도르 달리, 미로, 키스 해링 등 세기를 대표하는 거장들이 라벨 제작에 참여하면서 와인 라벨을 한정판 컬렉션으로 변모시키기도 했다. 이와 함께 샤토 무똥 로칠드는 1973년 보르도 공식 등급 체계에서 2등급에서 1등급으로 승격되면서 더욱 주목받았다.

로칠드 가문의 영향력은 보르도에 머물지 않았다. 필립 드 로칠드 남작은 1979년 미국 와인 산업의 거물 로버트 몬다비와 손잡고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에 '오퍼스 원'을 설립했다. 뒤를 이은 필리핀 드 로칠드 여남작은 1990년대 칠레로 시선을 돌렸다. 1997년 칠레 최대 와인 기업 중 하나인 콘차이토로와 함께 프리미엄 와인 '알마비바'를 선보였고 같은 해 바롱 필립 드 로칠드 마이포를 설립했다. 1999년에는 에스쿠도 로호를 출시했다.

로칠드가 칠레에서 노리는 것은 '보르도 와인의 저렴한 버전'이 아니다. 카스트로가 인터뷰에서 가장 반복해서 강조한 것도 이 대목이었다. "저희(로칠드)가 프랑스에서 오랜 시간 와인을 만들어왔지만, 칠레에서 프랑스 와인을 복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카스트로는 칠레 가톨릭대에서 농업공학과 양조학을 공부한 뒤 프랑스로 건너가 양조를 배웠다. 샤토 마고와 샴페인 볼랭저에서 수확기를 경험했고 부르고뉴에서 피노 누아를 공부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폴 홉스 와이너리에서도 일했다. 2017년 11월 에스쿠도 로호에 합류해 테크니컬 디렉터 겸 총괄 와인메이커를 맡고 있다.

그가 합류하면서 강조한 것은 '프랑스다움'이 아니라 오히려 '칠레다움'이었다. 이전까지 프랑스 출신 와인메이커가 담당했던 에스쿠도 로호에 칠레의 캐릭터와 테루아를 보다 선명하게 담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카스트로가 정의하는 칠레 와인의 핵심은 '신선함'과 '순수한 과실'이다. 과일의 아로마가 선명하게 드러나면서도 지나친 오크향이나 무거움이 없어야 한다. 여기에 로칠드가 보르도에서 축적한 정밀한 포도밭 관리와 양조 기술을 더한다. "에스쿠도 로호에서는 칠레의 테루아와 과실의 생동감에 로칠드가 추구하는 우아함을 결합하려고 합니다."

최고의 맛을 만들기 위해 섬세하고 집요한 과정들이 이어진다. 먼저 품종별로 가장 적합한 지역을 고른다. 같은 품종에서도 클론과 포도밭의 세부 조건을 살핀다. 회사 자료에 따르면 전자전도 방식으로 토양을 분석해 포도밭을 미세 구획으로 나누고 각 테루아에 적합한 품종을 심는다. 포도는 손으로 수확하고 광학 분류기를 거쳐 선별한다.

카스트로는 "모든 지역에서 똑같은 와인을 만드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좋은 와인은 품종과 장소가 제대로 만났을 때 만들어진다"고 거듭 강조했다.

정성껏 키운 포도…오크통 사용부터 철저하게 계산
로칠드가 작정하고 만드는 '프리미엄 칠레 와인'은 무엇이 다를까. 그가 꼽은 프리미엄의 기준은 농축도가 아니라 균형과 우아함, 숙성 잠재력이다. 좋은 포도가 자신에게 맞는 토양과 기후에서 자랐다면 과도한 추출로 힘을 강조하지 않아도 충분한 집중도와 구조감을 가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오크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철학이 드러난다. 기본적으로 프렌치 오크를 사용하지만 무조건 새 오크를 많이 쓰지는 않는다. 500L는 물론 일부 와인에는 600~2000L 크기의 용기를 사용한다. 용량이 커지면 와인과 오크의 접촉 비율이 낮아져 오크향이 와인을 덮는 것을 줄일 수 있다. 1~2년 사용한 배럴도 함께 쓴다.

프리미엄 라인으로 갈수록 포도밭과 양조 과정도 세분화된다. 마이포 밸리에서 생산하는 '에스쿠도 로호 오리진'은 카베르네 소비뇽 100%로, 2021 빈티지는 프렌치 오크에서 14개월 숙성한다. 이 가운데 새 오크 비중은 20%다.

최상위 제품 '바로네사 P.'는 로칠드가 칠레에서 구축하려는 프리미엄 와인의 정점에 있다. 필리핀 드 로칠드 여남작을 기리기 위해 만든 와인으로, 2018년 첫 빈티지를 내놨다. 2021 빈티지는 카베르네 소비뇽 81%에 카르메네르 8%, 쁘띠 베르도 5%, 카베르네 프랑과 시라를 각각 3% 블렌딩했다. 100% 프렌치 오크에서 16개월 숙성하며 새 오크 비중은 52%다.


한국 시장에서도 칠레 와인은 합리적인 가격과 접근성이 강점으로 인식돼왔다. 카스트로 역시 이 같은 이미지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칠레에는 합리적인 가격의 좋은 와인이 많지만 그것만이 칠레 와인의 전부는 아니다"라고 귀띔했다.

세계적으로 주류 소비가 줄어드는 추세지만 "적게 마셔도 더 좋은 걸 먹는다(Drink less, but drink better)"는 트렌드 변화를 짚었다. 술의 소비량이 줄어드는 상황에서도 소비자가 한 병을 고르는 기준은 높아질 수 있다는 얘기다. 로칠드가 에스쿠도 로호를 통해 겨냥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저렴해서 선택하는 칠레 와인'에서 '품질을 보고 선택하는 칠레 와인'으로 소비자 저변을 넓히겠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와인을 여러 병 소비했다면 이제는 양을 줄이더라도 더 좋은 품질의 와인을 선택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좋은 와인 한 병을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나누며 식사하는 걸 하나의 경험으로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저희 와인을 통해 이런 경험을 더 많이 하게 되길 바랍니다. 오늘 점심으로 갈비를 먹으며 에스쿠도 로호 오리진을 함께 마셨는데, 한우와 정말 잘 어울리더라고요. 함께 맛보시길 추천드립니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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