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 호황이 대학 입시 지형을 바꾸고 있다. 이공계 최상위권 학생들이 반도체 계약학과로 몰려 관련 학과 수시 경쟁률은 사상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지난 25년간 지속된 ‘의대 독주 체제’에도 균열이 예고되고 있다.
10일 한국경제신문이 전날 접수를 마감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수시 모집 현황을 분석한 결과 SK하이닉스 계약학과인 고려대 반도체공학과 지원자는 전년 대비 21.1% 증가했다. 경쟁률은 14.57 대 1로 2021년 학과 설립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에 비해 3개 대학 의대 지원자는 11.3% 감소했다.
반도체 계약학과를 자퇴하고 의대로 향한 반수생도 급감했다. 한양대 반도체공학과에선 2024년 재학생 74명 중 8명이 중도에 학교를 떠났는데, 2025년에는 이탈자가 ‘제로(0)’였다. 지난해 반수에 나서 한의대에 합격한 학생이 있었으나 잔류를 결정했다.대학 중심의 학벌주의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수원하이텍고 관계자는 “인문계고에서 전학하려는 학생뿐만 아니라 고교 과정을 다시 밟아 생산직에 지원하려는 대학생의 문의까지 들어온다”고 했다. SK하이닉스가 지난 6월 신입 채용에서 학력 제한을 전면 폐지해 이런 분위기는 확산할 전망이다.
‘공대 부활’ 기대도 커지고 있다. 김영오 서울대 공대 학장은 “지금의 ‘반도체 붐’은 한 명의 스타 엔지니어가 수백만, 수천만 명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의대 쏠림이 가속화하다가 공학이 다시 주목받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다”고 평가했다.
작년 한양·서강대 미등록·자퇴 '0', SKY 의대 지원자는 11.3% 줄어
우수한 학생이 입학하지만 그만큼 이탈률이 높다는 것이 교수들의 고민거리였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가 달라졌다. 박진섭 한양대 반도체공학과장은 “반수한 뒤 지방 한의대에 붙은 학생이 부모에게서 ‘SK하이닉스에 취업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조언을 듣고 학교에 남기로 했다”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올해 2월까지 학교를 떠난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반도체는 대표적인 경기 순환(사이클) 산업이다. 한창 호황기를 누리다가 언제 산업이 꺾일지 알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학부모와 학생의 선택이 달라진 데는 이들이 졸업 후 취업할 때까지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석학교수는 “범용인공지능(AGI)이 등장하고 인공지능(AI) 로봇이 상용화되면서 2040년까지 반도체 시장 규모가 지속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다”며 “학부모로서는 10년을 투자해 의사가 되는 것보다 4년 만에 반도체 기업에 취업하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직업 서열도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반도체학과 교수 사이에서는 “제자들이 입사만 하면 1년 만에 교수 7년 치 연봉을 받아버리니 교수로 데려오기가 더 어려워지겠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온다. 서울의 한 주요 대학 총장은 “한때 취업하고 싶은 곳 1위이던 대기업에 들어가도 삼전닉스가 아니면 ‘취업 재수’를 하겠다는 학생까지 생겼다”고 말했다.
결혼시장에서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재직자 선호도가 높아졌다. 결혼정보회사 선우에 따르면 삼성전자 재직자의 ‘배우자 지수’(100점 만점)는 83점에서 87점으로, SK하이닉스 재직자의 배우자 지수는 80점에서 83점으로 상승했다. 90점대 초반인 변호사와 판검사, 의사, 고위 공무원 등을 바짝 추격하고 있다.
삼전닉스 취업 열풍이 거세질수록 연구 인력 양성은 오히려 힘들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황철성 서울대 재료공학부 석좌교수는 “반도체 계약학과라고 해도 학부 수준에서 듣는 반도체 관련 수업은 사실상 많지 않다”며 “AI와 로봇 기술을 기반으로 한 공장 자동화 시대에도 대체할 수 없는 석박사 인력을 양성하는 게 더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고재연/이미경 기자 ye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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