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과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국내 반도체업계에는 인재 해외 유출에 따른 비상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주 52시간제 적용과 보수적인 연봉 체계 때문에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갖추고도 성과 보상이 미흡하다는 엔지니어의 불만이 컸기 때문이다.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 중국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 등 글로벌 기업들은 이 틈을 파고들었다. 연봉 2~5배 인상, 양도제한조건부주식(RSU) 지급, 해외 거주지 지원 등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5~10년 이상 노하우를 쌓은 핵심 엔지니어가 해외로 떠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같은 흐름의 판도를 바꾼 건 SK하이닉스가 촉발한 성과급 체계 개편이었다. 지난해 영업이익과 연동된 보상제도가 도입돼 저연차 직원까지 수억원대 성과급을 받게 되자 분위기가 급반전됐다. 이는 삼성전자 성과급 제도 개편으로 이어졌고 핵심 인재 전용 인센티브 도입 등 업계 전반의 처우 개선으로 확산했다.
해외 엑소더스는 잠잠해졌지만 그 대신 전선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한 국내 기업 간 인재 쟁탈전으로 옮겨붙었다.
특히 미세공정 및 메모리 관련 설계 기술을 보유한 석·박사급 핵심 인재 상당수가 SK하이닉스로 자리를 옮긴 것으로 알려졌다. 메모리 분야에 집중해온 SK하이닉스는 이들을 수혈함으로써 차세대 패키징과 로직·메모리 융합 공정 등 상대적으로 약한 분야의 기술과 노하우를 고도화했다.
삼전닉스 직원이 해외 대신 국내 이직을 선택하는 것은 대내외 환경 변화와도 맞물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외국인 취업 비자 문턱을 강화한 데다 국내 기업의 해외 거점 확대로 주재원 파견 시 성과급과 주재비를 동시에 챙길 수 있게 된 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연봉 차이, 자녀 교육 문제로 해외 이직을 선택하는 일이 많았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파격적인 보상을 안겨주면서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해외로 떠날 이유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근무 기간에 비례해 지급되는 성과급을 온전히 받기 위해 출산 계획을 미루거나 출산휴가 후 육아휴직 없이 곧바로 복귀하는 사례가 늘어난 것으로 전해졌다.
회사가 자금 전액을 지원하며 1년간 해외에서 자기계발 기회를 주던 삼성전자의 지역 전문가 과정조차 성과급 확정 이후 지원자가 자취를 감췄다는 후문이 나온다. 그 결과 삼성전자 반도체(DS) 부문과 SK하이닉스 이직률은 모두 역대 최저인 0.5%로 떨어졌다.
국내 팹리스 등 반도체 스타트업 출신 엔지니어가 대기업으로 쏠리는 ‘중고 신입’ 현상도 두드러진다. 스타트업에서 2~3년간 실무 경력을 쌓은 뒤 경력직 대신 신입 공채에 도전하는 식이다. 특히 입사 후 성과급이 많은 메모리사업부 배치를 장담할 수 없는 삼성전자와 달리, 확실한 메모리 보상 체계가 담보되는 SK하이닉스로 지원자가 몰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예전에는 몸값을 올리거나 신분을 전환하기 위해 미국과 대만행을 다각도로 타진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국내 대기업에 남아 성과급을 챙기는 게 훨씬 실속 있다는 인식이 팽배하다”고 말했다.
김채연/원종환 기자 why2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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