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뜨거운 이슈 하나만 뽑으라면 단연 ‘민음사 빵’이다. 민음사는 1966년부터 이어져온 출판사다. 대표적인 출판 서적은 1998년에 시작한 세계문학전집이다. 작품마다 명화를 두른 클래식한 표지로 오랫동안 서재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다. 그런 민음사가 최근 편의점 업체 GS25와 손잡고 빵을 출시했다. 세계문학전집의 표지와 민음사 캐릭터를 담은 패키지 안에 투명 책갈피를 동봉한 이 빵은 출시 4주 만에 100만개 넘게 팔렸다.
그렇다면 책 표지를 두른 빵은 왜 출시되었고, 어째서 이토록 각광받는 것일까. 포켓몬스터나 아이돌 같은 대단한 IP도 아닌 오래된 출판사일 뿐인데 말이다. 많은 이들은 이를 ‘텍스트힙(Text Hip)’이라는 트렌드적 소비 현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본질(essence)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
곰표는 '밀'이라는 원료를 매개로 밀맥주로 재탄생했고 출시 이후 3년간의 누적 판매량이 5,850만 개에 달했다. CU와 손잡은 연세우유도 마찬가지다. 우유 브랜드인 연세우유는 크림빵의 핵심 재료인 '우유'를 소재로 삼아 '연세우유 크림빵'을 출시했다. 이 상품은 출시 첫 달에만 50만 개가 팔렸고 1년 만에 1,900만 개, 2년 만에 5,000만 개의 누적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금 브랜드와 팝콘의 결합도 같은 원리로 작동했다. GS25와 청정원이 선보인 '미원 맛소금팝콘'은 맛소금의 핵심인 짭짤함을 팝콘의 맛과 직접 연결한 상품이었다. 출시 한 달 만에 약 30만 개가 팔렸고 GS25 자체브랜드 과자 50여 종 가운데 판매량 1위를 차지했다.
이렇듯 단순한 유행을 넘어 메가히트로 많은 사랑을 받은 콜라보 상품들에는 흥미로운 결합 이면에 상호 연결되는 맥락의 고리가 있었다. 이와 반대로 잉크펜 브랜드로 출시된 탄산수, 딱풀 모양의 사탕 등 겉보기엔 재밌지만 그 이상의 연결성을 찾을 수 없었던 협업들은 반짝하고 사라졌다.
당시에는 흥행하려면 낯설어도 분명한 납득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 트렌드가 5년 사이 완전히 진화했다. 진화의 본질은 바로 '맥락의 소멸’이다.

최근 흥미롭게 봤던 SNS 피드들도 그랬다. 몸통은 오리인데 얼굴은 귀여운 강아지인 이미지, 풍선처럼 접었다 펴서 입김을 불어 쓰는 선글라스, 인상주의 화풍으로 재현된 건물 모습까지. 이러한 상상의 구현은 수백억 원이 드는 영화나 광고에서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그런데 이제는 AI로 만든 이러한 콘텐츠나 이미지를 접하는 것이 평범한 일이 되었다. 생성형 AI를 사용하는 국민 비율도 빠르게 늘면서 AI는 전문가의 연구실을 넘어 일상적인 생산 환경으로 빠르게 정착해 생활 속 필수품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누구나 어떤 상상이든 그럴듯하게 시각화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개개인의 아이디어가 손쉽게 공유되는 '상상의 일상화'가 펼쳐지고 있다.

이 현상이 가져온 결정적인 변화가 '맥락의 소멸'이다. AI로 생성한 콘텐츠에는 필연적인 계기나 분명한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왜 하필 오리 몸통에 강아지 얼굴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 그렇게 조합해 보니 귀엽고 흥미롭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유와 개연성을 따지지 않고 즉각적인 감각으로 직행하는 AI 콘텐츠에 매일 노출되면서 대중 역시 복잡한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 '직관적인 자극'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긴 글을 읽고 의미를 해석하기보다 짧은 영상에서 찰나의 자극과 미감을 얻는 숏폼 시대의 감각이 AI라는 환경과 만나 한층 가속화되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인지적 변화는 화면 속 디지털 세계를 넘어 현실의 소비 방식에까지 전이되고 있다. 민음사 빵이 바로 그 현상 중 하나다. 민음사 빵을 집어 드는 이들은 출판사와 편의점 간의 개연성이나 논리적 연결고리를 따지지 않는다. 온라인에서 AI가 만들어낸 낯선 상상과 조합을 별다른 맥락과 이유를 따지지 않고 저장하고 공유하며 즐겼듯, 오프라인에서도 빵 봉지 위에 얹어진 책 표지라는 낯설고 재미난 사실, 패키지가 주는 고유한 미감, 투명 책갈피라는 소소한 위트, 그리고 지금 내 손끝에 남는 명확한 즐거움만으로도 상품을 소비하고 즐길 이유는 충분한 것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두고 "깊이 있는 맥락과 철학이 사라진 팝콘 소비"라며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섣부르게 퇴보로 볼 필요는 없다. 대중은 이미 복잡하고 피로한 세상 속에서 너무 많은 맥락과 의미를 강요받고 있다. 이런 시대에 ‘이유 없는 낯섦’이 주는 순수한 즐거움은 그 자체로 훌륭한 휴식이자 해방감이 된다. 무거운 맥락을 내려놓는 순간, 완전히 새로운 소비의 즐거움이 시작되는 셈이다.

최근 대중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던 다른 사례들도 마찬가지다. 한때 외국인 관광객이나 학교 견학지로만 여겨지던 국립중앙박물관이 '국중박'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젊은 층의 성지로 떠오른 배경에도 이러한 변화가 있었다. 박물관이 지닌 고유한 역사성과 권위적 맥락을 내려놓았기에, 고대 유물을 인간 분장으로 유쾌하게 따라 해보는 '국중박 분장놀이'나 흔한 관광 기념품을 넘어선 힙한 굿즈 출시가 가능했던 것이다.
근엄하고 엄숙하게만 여겨지던 불교 문화 역시 '힙'이라는 수식어를 얻으며 젊은 세대 사이에 스며들었다. 이 또한 종교가 지닌 무거운 맥락에서 벗어나 법당 앞마당에서 DJ를 부르고 춤을 추는 파티를 열거나 스님이 힙합 비트에 맞춰 법문을 전하는 등 파격적인 시도들이 이어졌기에 가능한 반응이다.
거대한 맥락을 벗어던지고 가벼워지는 바로 그 순간, 브랜드와 콘텐츠는 오히려 가장 강력한 대중적 주목을 받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계속해 마주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우리의 일상에 새로운 즐거움의 선택지를 더해줄 브랜드와 마케터들은 이제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설득하려 들면 소비자는 오히려 지루해한다. 마치 인스타그램 피드나 숏폼 콘텐츠를 스크롤하는 찰나의 순간처럼, 단 0.1초 만에 눈길을 사로잡는 시각적 파격과 직관적인 위트가 그 무엇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 그리고 완벽한 서사를 건네기보다 여백을 남겨 자유로운 놀이판을 깔아주어야 한다. 브랜드가 모든 맥락과 의미를 완벽하게 포장해서 전달할 필요는 없다.
소비자는 더 이상 "왜?"라고 묻지 않는다. 오직 "지금 나에게 즐거운가?"라고 물을 뿐이다. 촘촘한 맥락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감각의 즐거움을 대담하게 제시하는 브랜드만이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체감의 시대에 대중의 마음을 깊이 사로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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