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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집단 규제, '회장님'의 숙제 [지평의 공정거래 Insight]

입력 2026-09-28 09:53   수정 2026-09-28 10:03

한경 로앤비즈의 'Law Street' 칼럼은 기업과 개인에게 실용적인 법률 지식을 제공합니다. 전문 변호사들이 조세, 상속, 노동, 공정거래, M&A, 금융 등 다양한 분야의 법률 이슈를 다루며, 주요 판결 분석도 제공합니다.



매년 초 대기업 ‘회장님’들에게는 숙제가 부과된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요청하는 ‘대규모 기업집단 지정자료’ 제출 업무이다. ‘계열사 현황이 어떻게 되는지, 계열사 임원은 누구인지, 친족은 누가 있는지, 그들이 보유한 회사가 있는지, 재단은 없는지 등등 각종 정보와 자료를 빠짐없이 제출하라는 요청이다. 이 자료가 바로 ‘지정자료’다.

흔히 말하는 ‘재벌 대기업’의 공식 법률 용어는 ‘대규모기업집단’이다. 대규모기업집단은 기업 스스로 “이제 저희도 많이 컸으니 대규모기업집단이라고 불러주세요”라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공정위가 매년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집단을 골라서 ‘지정’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그래서 공정위가 대규모 기업집단 ‘지정’을 위해 제출을 요청하는 자료를 ‘지정자료’라고 한다.
동일인에 쏠린 자료 제출 책임
실무상 지정자료 제출의 법적 책임은 ‘회장님’ 개인에게 집중되어 있다. ‘회장님’의 법률상 용어는 ‘동일인’이다. 배우자, 친족, 임원, 계열회사는 ‘동일인관련자’라는 단어를 쓴다 (일상생활에서는 하등 사용할 일 없는 이런 단어의 연원을 변호사에게 물어보면 ‘그러게요’라고 하면서 눈만 끔벅끔벅할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동일인은 공정위의 요청을 받으면 수십, 수백개의 계열회사 정보, 수십, 수백명의 친족, 임원 등 ‘동일인관련자 정보’와 관련된 지정자료를 취합해 제출해야 한다. 자료에 거짓이나 누락이 있을 경우 법적 책임을 부담하겠다는 확약서도 첨부한다. 공정거래법상 공정위로부터 자료 제출을 받고 정당한 이유 없이 자료 제출을 거부하거나 거짓된 자료를 내면 형사처벌을 받게 되어 있으니, 그 책임을 동일인이 지겠다는 취지다.

동일인만큼 그 기업집단을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 동일인에게 이런 지정자료 제출의 책임을 부담시키는 게 영 불합리해 보이지는 않는다. 문제는 규범과 현실의 비대칭이다. 쉽게 말해, 숙제를 못 해서 받는 벌에 비해 숙제가 어렵다. 예를 들어 보자. 공정거래법에 따르면, ‘동일인관련자’인 친족의 범위는 “4촌 이내의 혈족, 3촌 이내의 인척, 계열회사 지분의 1% 이상을 소유하는 5~6촌인 혈족 및 4촌인 인척”이라고 되어 있다.

이게 뉘 신지 당최 감이 안 오는데, 한 마디로, 조카의 자녀, 고모부, 이모부, 숙모는 물론 배우자의 고모부, 이모부까지 포함된다. 혹여 계열사 지분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당숙, 당고모, 종숙, 종고모, 육촌, 재종형제까지 들어간다. 집집마다 다르겠지만 추석 명절에 한두 번 마주칠 관계일 수도 있고, 평생 연락 안 하고 사는 관계일 수도 있다(필자는 동일인이 아니어서 그런지 이분들 이름도 모른다).

동일인은 이들의 개인정보, 이들이 지분을 보유한 회사, 설립한 회사 등을 알아내서 주주현황, 임원현황 등의 자료를 제출해야 한다. 흥신소라도 써서 단서를 알아낸다고 한들, 그 친족이 이런 세부 정보를 순순히 건네지도 않는다. 동일인은 회사에서나 ‘회장님’이지, 배우자 이모부 입장에서는 ‘남’이 아닌가.

국가기관도 아니고 사인(私人)에 불과한 동일인에게 자료를 제출해야 한다는 법적 의무도 없다. 결국 동일인은 이러한 현실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거짓 없고 누락 없는 지정자료 제출에 대한 책임을 부담한다. 매년 자료 취합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형사처벌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을 안고 숙제를 제출한다.

지정자료 제도의 취지 자체를 부정하는 이는 없다. 기업집단의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들여다보고, 고의적인 위장계열사 운영이나 규제 회피를 막아야 한다. 문제는 지정자료의 정확성을 담보하는 방식이 ‘동일인 1인에 대한 책임’이라는 수단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재보다는 책임 경계가 먼저



공정거래법은 반드시 동일인에게만 지정자료 제출 의무를 부과하도록 하고 있지 않다. 공정거래법은 특정 계열회사나 동일인관련자에게 직접 자료 제출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해당 회사 정보를 쥐고 있는 친족, 임원 등에게 우선 지정자료 제출 의무를 부과하고, 동일인에게는 이를 총괄하거나 협조하도록 의무를 지우는 방식이 불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동일인에게는 자료를 내놓지 않아도 아무 탈이 없으니, 공정위에 자료 제출을 하지 않으면 탈이 나게 만드는 방식이다. 행정의 실효성을 높이고, 헌법상 ‘책임주의 원칙’에도 부합한다.

최근 지정자료 누락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여, 동일인 개인에게 과징금까지 물리는 법 개정안이 논의되고 있다. 물론 형사처벌은 그대로 있다. 고의로 계열사를 은폐해 사익을 편취했다면 이에 대한 엄정한 규제는 필요하다. 동시에 규제는 정교해야 한다. 처벌의 총량을 늘린다고 해서, 반드시 지정자료의 정확성이 더 확보되지는 않는다. 누가 실제로 정보를 지배하고 있는지,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주의의무의 한계는 어디인지부터 가려내야 한다.

대규모기업집단 규제에서 필요한 것은 제재의 무게가 아니라, 실현할 수 있는 ‘책임의 경계’를 올바르게 긋는 일이다. 점수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공부를 불성실하게 했거나 시험이 어렵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매타작으로 점수를 올리기 전에 시험 문제를 한번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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