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친코>에서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재일조선인 가족의 삶을 그린 이민진이 이번엔 그 이후 한인의 삶으로 시선을 옮겼다. 9년 만에 내놓은 신작 <아메리칸 학원>은 1990년대를 시작으로 한국과 호주, 미국으로 오가며 살아낸 사람들의 여정을 담은 거대한 디아스포라(이주) 소설이다. 인물들의 삶을 관통하는 것은 교육에 대한 집념이다. 자식에게 더 나은 미래를 마련해주려는 마음이 삶을 밀어붙이는 동시에 지탱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일곱 살에 서울에서 뉴욕으로 이주한 이민진은 자신과 반대로 움직인 가족의 시선에서 이번 작품을 시작한다. 1992년 호주에서 서울 개포동으로 온 한인 헬렌과 존 부부, 세 아이 보·DH·미도 가족에게 한국의 학교는 낯설다. 딸 미도는 칠판에서 허락 없이 자신이 쓴 오답을 지웠다는 이유로 선생님에게 손바닥을 매섭게 맞았다. 어머니 헬렌은 예고 없이 가정방문을 온 교사에게 촌지를 챙겨줄 수밖에 없다. 그 시절 학교를 기억하는 한국 독자를 이 이야기 속으로 깊이 끌어들인다.
한국을 알면서도, 낯설게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호칭에 대한 인물의 고민에서도 나타난다. 한인이지만 해외 생활이 익숙한 헬렌은 처음 만난 상대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다 가장 안전한 호칭인 ‘윤이 어머니’를 택한다. 어렵게 만난 여러 ‘한국 엄마’들과의 만남은 교육에 대한 헬렌의 태도를 확 바꿔놓는다. 호주에서는 아이에게 공부를 재촉하지 않던 헬렌은 가장 좋은 학원을 알아본다. 모두가 자녀를 보내고 싶어 하는 ‘이글아카데미’의 수강료는 혀를 내두를 만큼 비쌌지만, 결국 받아 달라고 원장에게 사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아이들이 다닌 학원은 한국 생활에 분명 도움이 된다. 낯을 가려 어려움을 겪던 미도는 친구 윤과 함께 학원에 다니면서 성적이 오르고 학교생활에도 적응한다. 하지만 입시를 위한 교육이 가족에게 닥칠 위험까지 막아주지는 못했다. 존은 상사의 부당한 지시를 따랐다가 서울에서 일자리를 잃고, 더 낮은 조건으로 호주에서 다시 일해야 한다. ‘이대’를 나온 헬렌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장에게 같은 대학 출신임을 내세우며 한인 쇼핑몰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학벌과 경력이 잘 통하지 않는 곳에서 생계를 꾸려야 하는 막막함이 부모 세대를 짓눌렀다.
외환위기 등 굴곡을 거치며 가족은 결국 미국으로 간다. 이곳의 한인들을 지탱하는 것은 결국 제목에 등장하는 ‘학원’이다. 이민진이 영어로 쓴 이 작품에도 한국어 고유명사인 ‘Hagwon(학원)’이라고 쓰였다. 한인들이 세우고 한인 자녀들이 다니는 미국 학원은 입시를 준비하는 장소인 동시에 이민자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터였다. 아이를 맡겨야 일할 수 있는 돌봄의 공간이면서 비슷한 고민과 자녀들에 대한 기대를 지닌 사람들이 만나는 공동체이기도 했다. 배움과 노동, 생계가 한곳에서 맞물리면서 ‘기형적 열풍’이라는 비난만으로 재단하기 어려운 학원의 의미가 여실히 드러난다.

작가는 이렇게 학원이라는 수단을 통해 역경을 딛고 살아가는 디아스포라 삶과 공동체를 그려내지만, 학부모가 열망하는 학원이 진정한 의미의 가르침을 주는 공간이라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이어간 한인의 삶과 자녀에게 더 나은 인생을 선사하려는 부모 세대의 집념이 주는 의미에 더 큰 무게를 둔다.
이는 미국에서 학원을 운영하는 인물이 학부모를 상대로 한 연설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아이들이 부모를 구원하는 데 매달리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풀면서 살아가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선언한다.
이민진은 이번 작품의 첫 문장으로 ‘삶의 규칙은 이미 바뀌었다’라고 적었다. 1997년 외환위기와 거듭된 이주가 인물들의 삶을 뒤흔들 것임을 예고하는 말이다. 동시에 이 문장은 작가가 5부 첫머리에 놓은 사회학자 장경섭의 ‘압축적 근대성’ 개념과도 맞물린다. 시간과 공간 모든 측면에서 일어나는 압축적이고도 급격한 변화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생존과 자녀의 삶을 보장받기 위해 대학 입시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이민진은 책에 실린 한국 독자를 위한 글에서 “전 세계의 한국인들은 무서운 속도로 변화하는 냉혹한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그 적응력이 가장 혹독하게 시험받는 곳이 바로 교육”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소설을 거의 10년에 걸쳐 써 내려가며 우리 모두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지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최한종 기자 onebell@hankyung.com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