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5~6년 전만 해도 한국 화장품 산업은 중국 시장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2020년 기준 국내 화장품의 대(對)중국 수출액은 약 38억달러로, 전체 수출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였다. 그러던 게 완전히 달라진 것은 'K뷰티 열풍'이 중국을 넘어 전 세계로 확산하면서부터다. K팝과 K드라마 등 한류의 인기에 제품 경쟁력까지 더해지면서 북미·유럽 소비자들도 한국 화장품을 찾기 시작했다.2023년 85억달러였던 국내 화장품 수출액은 2024년 처음으로 100억달러를 돌파한 데 이어 지난해 114억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올해도 9월까지 누적 수출액 111억4000만달러(약 14조9000억원)를 기록하며 연간 수출액 20조원 고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화려한 수출 성적표가 곧 성공적인 글로벌 안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K뷰티'라는 후광을 벗겨내면 개별 브랜드의 낮은 인지도와 해외 유통 채널에 대한 이해 부족은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다. K뷰티가 일시적 유행을 넘어 글로벌 뷰티 산업을 이끄는 주역으로 도약하려면 장기적 브랜드 경쟁력을 구축해야 할 때라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빌딩에서 만난 글로벌 경영 컨설팅 기업 레달코리아의 퍼 스테니우스 대표와 웨이커 량 리드는 'K뷰티의 다음 단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언했다. 유럽 화장품 유통 기업과 협력해 온 스테니우스 대표는 한국 뷰티 산업의 강점으로 까다로운 소비자와 탄탄한 제조 기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결합된 산업 생태계를 꼽았다.스테니우스 대표는 "한국의 뷰티 시장은 경쟁이 매우 치열하고 소비자들의 눈높이도 높다"며 "이는 한국 브랜드들이 끊임없이 혁신하도록 만드는 요인"이라고 짚었다. 이어 "여기에 기획서 하나만으로도 수준 높은 완제품을 뽑아낼 수 있는 뛰어난 제조업자개발생산(ODM) 업체가 뒷받침되면서 다양한 브랜드가 쏟아져 나올 수 있는 환경을 갖췄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강점은 국내 유통 시스템과 맞물려 더욱 큰 효과를 낸다. 대표적 사례가 CJ올리브영이다. 량 리드는 "유럽 유통업체들은 올리브영이 매 시즌 어떻게 그렇게 많은 신제품을 선보이는지 놀라워한다"며 "제품 개발뿐 아니라 시장의 피드백을 받아 다음 의사결정을 내리는 속도까지 빠르다는 게 한국의 강점"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국내에서 완벽하게 작동하던 이 '성공 방정식'이 국경을 넘는 순간 삐걱대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K뷰티의 인기에 힘입어 해외 유통 매대에 제품을 입점하는 일은 종전보다는 쉬워졌지만 이후 브랜드를 지속 성장시키는 데는 여전히 어려움을 겪는다.량 리드는 "현지 유통업체들이 K뷰티 제품에 관심을 갖고 입점시켰다가도 단기간 내 판매 성과를 내지 못하면 금세 매대에서 철수시키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며 "상당수 한국 뷰티 브랜드가 현지 유통사에 판매와 마케팅을 전적으로 맡기면서 소비자들이 어떤 이유로 제품을 구매하거나 외면하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무분별한 유통망 확대도 위험 요인이다. 예컨대 하나의 뷰티 브랜드가 미국에서는 월마트나 코스트코 같은 대형 할인점에 입점해 대중성을 꾀하면서도, 다른 나라에서는 프리미엄 백화점에 둥지를 트는 식이다. 량 리드는 "진출 초기부터 채널 전략이나 가격 정책이 잘못 설정되면 이후 시장 확대에 걸림돌이 될 수 있고, 브랜드의 가격 결정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짚었다.
K뷰티의 고속 성장을 견인한 제조 인프라가 더 이상 한국 기업만의 독점적 무기가 아니라는 점도 과제로 꼽힌다. 기술력을 인정받은 국내 화장품 ODM 기업에 대한 해외 브랜드 수요가 늘면서다. 실제 코스맥스는 세계 20대 뷰티 그룹 중 18곳에 제품을 공급하고 있을 정도다.
스테니우스 대표는 "위험에 직면한 것은 개별 K뷰티 브랜드들"이라며 "이들이 진정한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할 것인지, 유럽이나 미국의 대형 기업에 인수되거나 작은 브랜드들이 분산된 산업 구조로 남을 것인지가 핵심적인 문제"라고 강조했다.
K뷰티 브랜드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스테니우스 대표는 해외 유통업체와 계약하기 전 세 가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브랜드가 직접 통제할 영역과 유통 파트너의 책임 범위를 명확히 하고, 투자 비용이나 성과에 따른 보상은 어떻게 할지 등을 구체적으로 합의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는 "한국 브랜드들은 유통업체가 모든 것을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게 되면 통제력을 잃게 된다"며 "브랜드를 어떻게 포지셔닝하고 소비자 정보는 누가 확보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자본과 인력이 부족한 중소 브랜드일수록 여러 국가에 동시에 진출하기보다 유망한 시장에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테니우스 대표는 "결국은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라며 "브랜드 포지셔닝을 통제할 수 있고 적절한 유통 채널과 파트너가 있는 시장을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고 했다.
장기적 관점에서 브랜드를 육성하는 자세도 주문했다. 그는 "로레알도 단기간에 세계적인 화장품 기업으로 성장한 것은 아니다"라며 "한국 기업들도 모든 시장에 진출해 빠르게 매출을 올리려고 하기보다 장기 전략을 토대로 사업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수림 한경닷컴 기자 paksr36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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