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2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려던 A씨는 귀국을 엿새 앞두고 항공기 정비 문제로 항공편 일정이 변경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A씨는 추가 체류비에 대한 배상을 요구했지만 항공사는 운항 일정 변경이 예고 없이 발생할 수 있고 사전에 통보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국내외 주요 항공사 22곳 중 21곳이 항공사 책임으로 항공편이 결항하더라도 운임 환불 외 별도의 배상 규정이 없거나 배상 여부를 항공사 재량에 맡기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21일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지난 3월부터 6월까지 국내 항공사 11곳과 외국 항공사 11곳 등 총 22곳의 여객운송약관을 조사한 결과, 21곳에서 항공사 귀책에 따른 결항 시 배상 규정이 미비한 것으로 나타났다. 승객이 개인 사정으로 항공권을 취소하면 위약금을 내야 하지만 항공사 사정으로 항공편이 취소돼 숙박이나 렌터카 예약을 변경하더라도 추가 비용을 보상받기는 어려운 구조다.

이 같은 문제는 항공사 책임으로 항공편이 결항했을 때 적용할 명확한 배상 규정이 부족한 데서 비롯된다. 국내법과 국제항공운송에 적용되는 '몬트리올 협약'에는 결항 자체에 대한 배상책임이 명시돼 있지 않다. 다만 국내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은 운송 불이행이나 지연이 발생하면 대체 항공편 제공 여부와 지연 시간 등에 따라 배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반면 유럽연합(EU)과 캐나다는 항공사 책임으로 항공편이 결항할 경우 운항 거리와 도착 지연 시간 등에 따라 일정 금액을 보상하도록 하고 있다. EU는 250~600유로, 캐나다는 125~1000캐나다달러의 보상 기준을 두고 있다.
일부 외국 항공사는 국제협약보다 불리한 배상 기준을 약관에 적용하고 있었다. 외항사 2곳은 승객이 사망하거나 다쳤을 때 적용하는 배상책임 기준을 몬트리올 협약상 기준인 15만1880SDR(약 3억1464만원)보다 약 4800만원 낮은 12만8821SDR로 정했다. SDR은 국제통화기금(IMF)이 정한 특별인출권으로, 국제항공운송의 배상책임을 산정하는 데 쓰이는 단위다.

항공권을 정원보다 많이 판매하는 이른바 '오버부킹' 관련 약관에서도 문제가 드러났다. 국내에서 출발하는 국제선은 초과 판매로 탑승하지 못한 승객에게 대체편 제공 여부 등에 따라 200~600달러를 배상해야 한다. 그러나 외항사 2곳은 환불 외 별도 배상책임을 명시하지 않거나 배상 방식을 항공사가 선택하도록 했다. 실제 항공권 초과 판매로 당일 탑승을 거부당한 B씨는 대체 항공편을 제공받지 못했고, 운임 환불과 배상 요구도 거절당했다.
항공사가 배상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는 '불가항력' 사유도 광범위하게 규정돼 있었다. 조사 대상 22곳 중 12곳은 '예측하지 못한 사실', '노동력 부족', '기장 서명 후 발생한 기술적 문제' 등을 면책 사유에 포함했다. 인력 확보나 항공기 정비 등 항공사가 관리해야 할 문제까지 배상책임을 피하는 근거로 활용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항공 관련 소비자 피해도 늘고 있다. 지난해 한국소비자원에 접수된 항공여객운송서비스 피해구제 신청은 3201건으로 전년(2532건)보다 26.4% 증가했다. 2021년(485건)과 비교하면 4년 만에 6배 이상으로 늘었다. 지난해 전체 신청 중 운송 불이행·지연에 따른 피해는 565건으로 17.7%를 차지했다.
한국소비자원은 항공사의 경영·운영상 문제까지 불가항력으로 인정하는 약관을 개선하고, 결항이나 탑승 거부로 소비자 피해가 발생했을 때 실질적인 배상이 이뤄지도록 관련 규정을 정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영총 기자 youngcho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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