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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만든 법안만 6100건…규제 없애려 또 법 만든다

입력 2026-10-21 17:52   수정 2026-10-22 02:31


유럽연합(EU)이 지난해 새로 내놓거나 고친 법령, 행정조치는 2575건에 달했다. 27개 회원국이 해당 EU 지침 등을 국내법에 반영한 조치 3500여 건까지 합하면 6100건에 이른다. EU 차원의 기본법에 이어 세부 규칙을 마련하고, 이를 다시 각국 국내법으로 옮기는 ‘입법 연쇄’가 기업의 규제 대응 부담을 키우고 경제 전반을 저성장으로 몰아넣고 있다.

21일 한국경제신문이 EU 법령 데이터베이스(EUR-Lex)를 분석한 결과 EU의 법적 채택 행위는 2021년 2371건에서 지난해 2575건으로 증가했다. 한국의 시행령 및 시행규칙 등과 비슷한 효력을 내는 각종 위임, 이행법령, 유럽중앙은행(ECB) 지침 등까지 포함해 집계한 수치다. 올해도 1877건의 법령과 행정조치 등이 새로 생겼다.

법안이 시행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길다. 배터리 규제법안은 2023년 EU 차원에서 제정됐지만 위임 규정은 지난해 나와 회원국들이 국내법에 반영했다. 이 법안의 시행 결정은 올해 들어서야 내려졌다. 중국 CATL 등이 약진하는 동안 유럽 배터리기업들은 손가락만 빨고 있었던 이유 중 하나다. 지난달 유럽투자은행(EIB) 조사에서 EU 기업의 20%가 새로운 규제, 표준, 인증 준수를 주요 사업 장애물로 꼽은 배경이다.

EU집행위원회도 이를 의식해 규제 감축을 시도하고 있지만 복잡한 입법 체계의 장벽에 부딪혔다. EU가 올해 2월 기업의 공시 및 공급망 실사 의무를 완화하기 위해 내놓은 지침이 대표적이다. 규제를 없애기 위해 다시 새 법안을 마련하는 과정에 1년이 걸렸고, 회원국의 국내법 정비 절차도 남아 있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우리는 쉬지 않고 새 규제를 생산하고 또 생산하는 기계와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기본법 생기면 이행·위임법 추가…중복 법 많고 변경·시행 연기 잦아
같은 규제도 회원국별 적용 차이…中企, 법규 대응에 인력 10% 투입
‘브뤼셀 이펙트.’

유럽연합(EU) 의회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만든 각종 규제 체계가 세계 규제의 표준이 되는 현상을 의미하는 단어다. 실제 개인정보 보호부터 스마트폰 충전 단자까지 EU가 선제적으로 내놓은 규제안을 다른 국가가 채택한 사례가 많다. 하지만 산업 영역에서는 이처럼 적극적인 규제 행위가 기업의 대응 비용을 키워 유럽 기업의 산업 경쟁력을 떨어트렸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 하나에 추가 규제 줄줄이
27개 회원국으로 구성된 연합체의 성격상 EU 법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 제정된다. 우선 유럽의회와 EU 이사회가 채택하는 기본법률은 정책 목표와 핵심 의무를 정한다. 이후 EU 집행위가 위임법령으로 내용을 보완하거나 이행 법령으로 공통 집행 조건을 구체화한다.

이렇게 마련된 EU 규정은 원칙적으로 회원국에 직접 적용된다. 하지만 구체적인 지침은 개별 국가가 국내법 제·개정을 통해 정해야 한다. 같은 정책 목표라도 국내법 전환 등을 거치면서 기업이 확인할 사항이 늘어난다. 시행 과정에서 문제가 드러나면 이를 바로잡는 개정법이 또 나온다.

유럽 싱크탱크 브뤼겔이 EU 법령 데이터베이스를 분석한 결과 2019~2024년 통상입법 절차로 채택된 법은 435건이었다. 같은 기간 위임법은 934건, 이행법은 5131건이었다. 법률 한 건에 하위 법령이 14건씩 생겨난 것이다. 2023년 제정된 배터리 규정의 경우 위임법 32건, 이행법 15건이 제정됐거나 생길 예정이다.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2024년 발표한 유럽 경쟁력 보고서는 2019~2024년 EU에서 채택한 법령을 약 1만3000건으로 집계했다. 드라기 전 총재는 “EU 법률의 누적과 잦은 변경에 대응해야 하고, 이는 법령 중복과 불일치로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기업 불확실성 높아져
이처럼 법체계가 복잡하다 보니 규제를 줄이려고 해도 비용이 많이 든다. EU집행위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올해 6월까지 내놓은 12개 규제 단순화 패키지가 단적인 예다. 기존 법을 다시 고치는 법을 제정하는 것으로 개별 법안은 30건에 이른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관련 행정 부담이 약 170억유로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역시 해당 법안은 EU 의회를 거쳐 회원국의 국내법 개정까지 끝나야 실행될 수 있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첫 패키지는 제안부터 최종 승인까지 1년이 걸렸다. 작년 12월 제안된 환경 분야 패키지는 일부 법안에 대해 지난달 30일에야 EU 이사회가 논의를 시작했다. 유럽 경영자단체 비즈니스유럽의 마르쿠스 바이러 사무총장은 “기업들은 현장에서 체감할 만한 개선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회원국 단계에서 규제가 다시 불어나는 문제도 있다. 관련 지침을 국내법으로 옮기면서 의무를 덧붙이는 이른바 ‘골드 플레이팅’(규제 덧붙이기)이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규제 단순화에 진지하다면 골드 플레이팅을 막는 협약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처리가 결정된 법안의 시행 시기를 예측하기 어려운 것도 문제다. 산림파괴방지법(EUDR)은 소고기, 커피, 고무, 목재 등과 연관된 제품이 산림 훼손과 무관하다는 점을 기업이 입증하도록 한 법이다. 2023년 제정돼 2024년 12월 적용될 예정이었다. 기업의 공급망 확인 부담 등으로 적용이 1년 연기됐다. 작년 12월에는 다시 시행을 1년 미뤘다. 시행을 두 달여 앞둔 지금도 일부 회원국은 추가 완화를 요구하고 있다.

배터리 규제와 관련한 원료 공급망 실사 의무는 이를 확인할 제3자 검증기관 지정이 늦어지면서 적용이 2025년 8월에서 2027년 8월로 2년 미뤄졌다.

결국 기업이 부담해야 할 비용은 불어난다. 유럽투자은행(EIB)의 지난해 기업투자조사에 따르면 EU 기업의 약 86%는 규제 준수 업무를 전담하는 인력을 두고 있었다. 중소기업의 22%는 전체 직원의 10% 이상이 관련 업무에 매달렸다. 규제 준수를 위한 인건비는 EU 기업 매출의 1.1%에 달했다.

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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