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경쟁력의 핵심은 빅데이터·빅모델·빅컴퓨팅, 이른바 ‘3 BIG’이다.빅컴퓨팅에선 AI 추론 수요에 힘입어 우리 기업이 메모리 반도체 특수를 누리고 있다. 다만 이 판은 우리가 짠 것이 아니다. 판을 짠 것은 미국 빅테크와 엔비디아이고, 우리는 부품을 공급하는 위치에 있다. 남이 일으킨 순풍은 언제든 역풍으로 바뀔 수 있다.
빅모델에선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경선이 진행 중이다. 성능은 아직 세계 최고 수준과 격차가 있지만 독자 역량을 확보한다는 전략적 의의가 분명하다. 하지만 공짜로 제공한다고 온 국민이 쓸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곤란하다. 사용자는 애국심이 아니라 성능으로 고른다. 독자 모델이 설 자리는 국민 챗봇이 아니라 제조 현장이다. 현장 노하우, 곧 암묵지를 지키고 담아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빅데이터에서 한국만의 무기는 제조업 기반과 거기서 쌓인 암묵지다. 수율을 높이는 공정 조정, 숙련공 손끝의 감각은 매뉴얼에 다 담기지 않는다. 피지컬 AI 시대에 이는 최고급 학습 원료다. 대응에 따라 기회가 될 수도, 남 좋은 일로 끝날 수도 있다.
IBM과 마이크로소프트(MS)의 역사가 그 경고다. 메인프레임의 강자 IBM은 1981년 PC를 내놓아 사실상 표준을 세웠다. 운영체제는 당시 작은 회사이던 MS에 맡겼고, MS는 이를 다른 제조사에도 팔 권리를 확보했다. 곧 값싼 ‘IBM 클론’이 쏟아졌고, PC 운영체제 시장은 MS의 도스와 윈도가 장악했다. PC 시대는 IBM이 열었으나 과실은 MS가 누렸다. IBM은 1987년 독자 규격으로 반격했지만 실패했다. 1994년 세계 PC 시장에서 컴팩에 1위 자리를 내줬고, 수익성이 악화한 PC 사업을 급기야 2004년 레노버에 매각했다. IBM PC 규격은 살아남았지만 정작 IBM은 쓸쓸히 퇴장했다.
오늘에 대입하면 우리 제조 현장은 PC, 현장의 경험과 지혜인 암묵지는 윈도, 이를 노리는 해외 AI 기업은 MS다. 그들이 암묵지를 코드로 옮겨 ‘제조 윈도’를 만들면 이를 탑재한 값싼 공장이 세계 곳곳에 들어선다. 수많은 클론이 IBM PC를 밀어냈듯 이들 ‘클론 공장’이 한국의 제조 현장을 대체할 수 있다. 독점적 지위의 이윤은 암묵지를 코드화한 쪽이 가져간다. 우리 지혜로 만들어진 제조 윈도를 되레 사용료를 내고 빌려 써야 할지도 모른다.
한번 넘어간 표준을 되찾기란 어렵다. 우리에게는 IBM PC의 전철을 밟지 않을 혜안이 필요하다. 정부가 독자 AI 사업을 프런티어 AI와 산업 확산, 두 갈래로 재편하기로 한 것은 바람직한 궤도 수정이다. 시너지를 내려면 독자 모델이 현장의 암묵지, 넓은 의미의 각종 데이터와 만나야 한다. 이 과정에서 데이터는 안전하게 보호받아야 한다.
다행히 한국은 데이터를 암호화한 채 연산하는 동형암호 분야에서 세계적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AI에 널리 쓰이는 방식인 CKKS도 서울대 연구진이 개발했다. 동형암호와 외부 접근이 통제된 클린룸을 적절히 결합하면 기업은 원본 데이터의 노출을 최소화하면서 데이터를 AI에 활용할 수 있다.
관건은 칩과 모델, 데이터에 보안까지 꿰어 현장의 문제, 곧 AI 수요와 맞물리게 하는 ‘풀스택’이다. AI 정책도 공급만 강조해선 곤란하다. 공급과 수요, 이론과 현장, 사업주와 청년, 수도권과 지방이 만나야 한다. 필자가 10년 가까이 운영해온 서울대 ABC·ABS 과정은 경영자와 청년, 기업과 구직자, 기술과 현장이 만나는 장이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IBM의 교훈을 거울삼아 우리 제조 현장을 지킬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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