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월이다. 바람이 서늘해지면 나는 어김없이 한 사람을 떠올린다. 메밀국수 한 그릇을 마음대로 드시지 못하던 분, 이건희 회장이다. 그분이 떠나신 지 여섯 번째 가을이 왔다.1977년 미국 피츠버그에서 그분을 처음 뵀다. 걸프오일 본사에서 한국 투자 파트너를 찾던 스물여덟 살 젊은이의 전화 한 통에 그분은 사흘 만에 태평양을 건너오셨다. 레슬링 선수처럼 단단한 어깨, 한 마디 한 마디를 입 안에서 되새기듯 천천히 고르시던 말씨. 남동생이 없던 그분은 일곱 살 아래인 나를 동생처럼 대해 주셨고, 나는 그분을 형님처럼 모셨다.
이듬해 서울대에 부임한 후 인사드리러 가자 점심을 사 주며 “형으로서 충고 하나 하겠다”고 하셨다. “한국에서 살려면 부자가 돼야 해.”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고개를 살짝 돌리며 수줍게 웃고는 덧붙이셨다. 돈부자 말고 친구 부자가 되라고, 귀천 가리지 말고 사람을 두루 사귀라고. 사람들이 나를 ‘마당발’이라고 불러 줄 때마다 그 점심 한 끼를 생각한다. 그분이 내게 남긴 가장 큰 재산이다.
1978년 가을, 나는 삼성그룹에 새로 생긴 기획조정실의 첫 장기전략계획을 맡았다. ‘전략’이라는 말조차 낯설던 시절, 누구도 정답을 모르는 길을 그분과 함께 더듬어 갔다. 그 무렵 동방생명 빌딩 27층 집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그분이 말없이 창가로 걸어가셨다. 따라가 나란히 서서 내려다보니 길 건너 메밀국수 집 ‘유림’이 보였다. “내가 정말 가고 싶은 데가 저기인데, 함부로 못 가. 조 교수가 부럽다.”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그 한마디에 담긴 쓸쓸함을, 당시에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세상이 부러워하는 자리에 앉은 사람이 국수 한 그릇을 아쉬워하고 있다니….
1987년 회장에 오른 뒤로는 예전처럼 불쑥 찾아뵐 수 없는 분이 되셨다. 가끔 승지원으로 부르시면 달려가 식사를 함께했지만, 집무실 창가에 나란히 서서 국숫집을 내려다보던 그 시절이 늘 생각났다.
훗날 경영학자로서 나는 그분을 ‘한 사람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움직이는 메커니즘으로 기업을 이끈 경영자’라고 정리했다. 1990년대 초 내가 디자인에 관한 책 한 권을 써서 서가에 꽂아 두는 동안, 그분은 디자인을 앞세워 불과 10년 만에 이 나라를 아시아의 디자인 강국으로 바꿔 놓으셨다. 디자인을 말씀하시고, 창조를 말씀하시고, 마지막에는 공유가치 창출을 말씀하셨다. 그 화두들 밑에는 존경받는 기업을 넘어 사랑받는 기업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 흐르고 있었다. 그토록 외로운 자리에 있으면서, 삼성은 사람들 곁으로 더 가까이 가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2014년 봄 쓰러진 뒤 여섯 해를 병상에 계셨다. 나는 언젠가 다시 일어나 그 느린 말씨로 새 구상을 들려주시리라 믿었다. 타계하시던 해, 한 인터뷰에서 질문을 받았다. 이 회장이 건강해지셔서 다시 마주하게 되면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냐고. 가장 먼저 떠오른 대답은 이것이었다. “유림 메밀국수집에 함께 가시자고 하겠습니다.” 그 말이 병상의 그분께 닿았을지 나는 모른다. 그리고 그해 시월, 부음을 들었다.
그날 “조 교수가 부럽다”고 하던 분은 떠나셨고, 그 부러움을 받던 조 교수는 어느덧 팔십을 바라보는 노교수가 됐다. 이제야 알겠다. 그날 창가에서 그분이 정말 아쉬워하신 것은 국수 한 그릇이 아니었다. 아무 날이나 친구와 마주 앉아 국수를 먹을 수 있는, 그 평범한 하루였다.
회장님, 그곳에서는 누구 눈치 보지 않고 메밀국수 한 그릇 편히 드시는지요. 언젠가 찾아뵈면 국수 한 그릇 사 주십시오. 충고해주신 대로 친구 부자가 된 동생이, 이야기보따리를 잔뜩 들고 가겠습니다.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