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달러 환율이 160엔을 넘나들 정도로 엔화 약세가 계속되고 있지만, 한국 수출엔 별 영향이 없다는 분석이 나왔다. 수출 주력상품인 반도체와 석유제품, 자동차 및 부품이 엔저와 별 관계가 없기 때문에 엔화 가치가 10% 떨어져도 한국의 수출금액 감소폭은 미미하다는 분석이다. 오히려 제품 가격이나 글로벌 업황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는 지적이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이 28일 발표한 ‘엔화 변동이 한국 수출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다르면 엔·달러 환율이 10% 상승해 엔화 가치가 하락할 경우 한국의 달러 표시 수출단가는 1.43%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수출물량은 1.36% 늘어 전체 수출금액 감소폭이 0.07%에 그쳤다. 국내 수출단가가 1% 하락할 때 수출물량이 0.95% 증가하는 것으로 추정됐다.
최근 엔저가 심화하면서 국내 수출기업의 가격 경쟁력 악화에 대한 우려가 컸다. 올 하반기 엔·달러 환율은 한때 163.9엔까지 상승해 40년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반면 원화는 강세를 보이면서 원·엔 환율은 100엔당 830원대로 떨어졌다. 이는 2008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엔화만 약세를 보이고 원화가 상대적으로 강해지면서 일본 기업이 가격을 낮출 수 있는 여지가 커져 한국 수출기업에는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많았다. 그러나 무협은 주요 수출산업 상당수에서 엔화와 수출단가 사이의 뚜렷한 관계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반도체는 D램 가격과 글로벌 반도체 업황, 석유제품은 국제 석유제품 가격과 중국 산업생산, 자동차·부품은 친환경차 수출 비중과 미국 경기 흐름이 수출가격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는 설명이다.
무협은 반도체의 경우 최근 10년간 한국과 일본의 수출 경쟁도 자체가 낮아졌다고 설명했다. 세계시장에서 양국의 반도체 수출경합도는 2015년 0.53에서 지난해 0.49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한국 반도체 수출은 연평균 20.6% 증가해 일본의 6.4%를 크게 웃돌았다. 전체 산업의 한·일 수출경합도도 2015년 0.49에서 지난해 0.45로 낮아졌다. 무선통신기기는 0.66에서 0.46, 가전은 0.64에서 0.53으로 각각 떨어졌다.
시장별로도 한·일 간 수출경합은 대체로 완화됐다. 미국 시장의 수출경합도는 2015년 0.51에서 지난해 0.46으로 낮아졌고 중국은 0.48에서 0.39, 아세안은 0.41에서 0.36으로 하락했다. 다만 미국 시장에서는 석유제품과 자동차·부품 등 일부 품목의 한·일 경쟁이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엔저의 영향을 직접 받는 업종이 없진 않았다. 철강·비철금속은 엔·달러 환율이 10% 상승할 때 수출단가가 약 1.9% 떨어지는 것으로 분석됐다. 일본 철강업체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면 국내 기업도 수출가격을 낮춰야 하는 압력이 커진다는 의미다. 기계업종 역시 엔화 약세 때 수출단가가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통계적 유의성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철강·비철금속은 국제 금속·광물 가격, 기계는 미국 자본재 수주와 중국 산업생산 등 전방산업 수요의 영향이 더 컸다.
최근 10년간 한국의 수출 증가율이 일본을 앞선 점도 엔저 충격을 완충한 것으로 분석됐다. 2015~2025년 전체 수출의 연평균 증가율은 한국이 6.1%로 일본의 3.3%를 웃돌았다. 기계는 한국 7.3%, 일본 2.1%, 자동차·부품은 각각 6.0%, 2.2%였다. 석유제품은 한국 수출이 연평균 7.4% 증가한 반면 일본은 5.2% 감소했다.
다만 무협은 엔저와 원화 강세가 장기간 동시에 이어지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원화와 엔화는 달러 움직임에 따라 비슷한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일본 제품의 가격 경쟁력 상승을 일부 완충했다. 그러나 일본은 재정건전성 우려로 엔화 약세가 계속되고, 한국은 반도체 수출 호조로 원화가 강세를 보이면 원·엔 환율이 추가로 낮아질 수 있다.
무협은 엔저 자체보다는 산업별 가격 결정 요인과 비가격 경쟁력을 함께 살펴야 한다고 조언했다. 엔저 영향을 상대적으로 크게 받는 철강·비철금속은 고부가·고기능 제품 개발과 시장 다변화가 필요하고, 반도체는 첨단 메모리와 패키징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제언했다. 자동차는 하이브리드·전기차 등 시장별 수요에 대응하고 품질과 브랜드, 서비스 경쟁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진옥희 무협 연구원은 “엔화 약세가 일본 제품과의 가격 경쟁에서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인식이 있지만 주요 품목 상당수에서는 환율보다 산업별 업황이 수출단가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엔화와 원화의 변동성이 중장기적으로 확대될 가능성에 대비해 기업과 정부는 주요 산업의 비가격 경쟁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광식 기자 bumer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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