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미국 포트워스에서 펼쳐진 드라마가 4년 만에 서울에서 재연됐다. 당시 18세로 승전보를 전했던 청년은 이제 세계 무대를 누비는 피아니스트로 성장했다. 같은 곡, 같은 지휘자와 함께 선 무대에서 그의 음악은 한층 깊어져 있었다.
지난 7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 피아니스트 임윤찬(22)이 마에스트라 마린 알솝의 지휘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했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그에게 우승을 안긴 바로 그 곡, 그 지휘자다. 당시 최연소 참가자였던 임윤찬의 연주가 끝나고 알솝은 눈물을 훔쳤고, 이 장면이 담긴 영상은 조회 수 2000만 회를 넘기며 화제가 됐다.
라흐마니노프가 1909년 미국 순회공연을 위해 쓴 이 곡은 '협주곡의 에베레스트'로 불린다. 1악장의 소박한 러시아 민요풍 선율로 출발해 2악장의 짙은 서정을 지나, 3악장의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피아니스트에겐 고도의 테크닉과 지구력, 오케스트라와의 긴밀한 호흡을 모두 요구하는 난곡이다.

이날 무대는 일각의 우려를 말끔히 씻어냈다. 5·6일 공연에 이어 예정된 휴식일(7일)을 반납하고 협연이 추가되면서 '아티스트 혹사' 논란이 일었으나, 이날 임윤찬은 지친 기색 없이 밀도 높은 연주를 펼쳤다.
알솝과 눈빛을 주고받은 뒤 나직하게 노래하듯 시작한 첫 음은 작지만 객석 맨 뒤까지 또렷하게 가닿았다. 고개를 숙인 채 미동 없이 첫 선율을 빚어내는 모습은 마치 구도자의 기도처럼 경건해 보였다.
4년 전 콩쿠르 무대를 장악했던 팽팽한 긴장감은 한결 자유롭고 다채로운 해석으로 진화했다. 그가 "세잔이 생트 빅투아르 산을 매번 다른 각도와 빛 속에서 그렸듯이 저도 그럴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그의 연주는 콩쿠르 때와는 또 달랐다. 1악장 말미 카덴차에서 서서히 자신의 세계를 펼쳐 보인 임윤찬은 2악장에서 목관과 대화하듯 왈츠풍 선율을 주고받으며 특유의 탄력 있는 리듬감을 살렸다.
3악장은 ‘듣는 음악’을 넘어 ‘보는 음악’이었다. 절정을 향해 내달리는 그의 연주는 거대한 산을 오르는 도전처럼 보였고, 객석에는 팽팽한 긴장과 환희가 함께 전해졌다. 마침내 3만5000여 개의 음표가 눈부시게 쏟아지고, 코다는 D장조의 환희로 치달았다.
음원이나 영상이 담지 못하는 실연의 감동이 객석을 직격했다. 연주자와 지휘자, 악단이 주고받는 호흡까지 눈과 귀로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지휘자 알솝의 조율 능력도 빛났다. 그는 협연자를 든든하게 받치는 데 그치지 않고 오케스트라 고유의 음색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2024~2025 시즌부터 필라델피아 악단의 수석 객원지휘자를 맡은 알솝은 2부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돈 후안'과 브람스의 '대학 축전 서곡'을 모두 악보 없이 지휘했다. 126년 전통을 자랑하는 미국 명문 악단 특유의 두텁고 풍성한 현악 사운드와 밝고 진취적인 에너지가 완벽한 마침표를 찍었다
조민선 기자 sw75j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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