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테이블코인이 글로벌 금융의 화두로 떠오르면서 각국 중앙은행과 금융당국의 반응이 주목된다. 한결같이 '리스크'를 전면에 내세운다. 금융안정을 해친다, 자금세탁에 악용될 수 있다, 통화정책의 효과가 약화된다, 반론의 논거는 다양하지만 결론은 하나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런데 이 반대 논리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불편한 질문이 떠오른다. 과연 이것이 순수한 리스크 관리인가, 아니면 기득권 수호인가.
◆ 수수료가 사라지는 세상을 은행은 원하지 않는다
스테이블코인의 본질적 가치는 단순하다. 국경을 넘는 송금에 며칠씩 소요되고, 수수료와 환전 스프레드로 수익을 취하는 기존 은행 시스템을 우회한다는 것이다. 기업이 해외 거래처에 대금을 송금할 때, 현재는 복수의 중개 은행을 거치며 상당한 비용이 발생한다.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하면 실시간으로, 거의 비용 없이 처리가 가능하다.
기업 입장에서는 혁명적인 비용 절감이다. 중소기업이 글로벌 시장에 진출할 때 가장 높은 장벽 중 하나가 금융 거래비용인데, 스테이블코인은 이를 근본적으로 낮춘다. 경제 전체로 보면 생산성과 국가 경쟁력 향상으로 직결되는 문제다.
문제는 그 비용이 고스란히 은행의 수익이었다는 데 있다. 국제송금 수수료, 환전 마진, 결제 중개 수익. 스테이블코인이 대체하는 영역이 정확히 은행의 핵심 수익원과 일치한다. 중앙은행이 리스크를 강조할수록, 그 이면에는 시중은행의 수익기반을 보호해야 한다는 현실적 논리가 자리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중앙은행 반대 논리의 허점
중앙은행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시중은행이 흔들리면 금융시스템 전체가 불안해진다는 우려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그러나 그 논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장된 측면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예금 이탈 논리다. 스테이블코인은 본질적으로 결제와 송금의 수단이지 저축의 수단이 아니다. 이자도 없고 예금자보호도 적용되지 않는 현행 스테이블코인으로 굳이 은행 예금을 옮길 유인은 크지 않다. 예금 이탈 우려는 스테이블코인이 이자를 지급하는 수익 경쟁 상품으로 진화할 경우의 조건부 시나리오임에도, 이를 마치 필연적 결과처럼 제시하는 것은 리스크를 과장하는 측면이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예금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결제 인프라를 대체하는 것이다.
어떤 새로운 제도든 초기에는 리스크가 수반된다. 그 리스크를 관리하는 것이 금융당국의 본래 역할이지, 변화 자체를 원천 차단하는 것이 역할일 수는 없다. 오히려 제도 밖에서 유통되는 상황이 리스크를 더 키운다는 것은 금융 감독의 상식이다.
이러한 저항이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결정적인 변수는 미국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기축통화 패권 연장의 전략적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는 방향을 취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은 2025년 GENIUS Act를 입법화하여 스테이블코인 발행의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USDC와 USDT는 이미 글로벌 실거래에서 수조 달러 규모로 유통 중이다. 미국이 전략적으로 드라이브를 걸기 시작한 이상, 여타 국가들이 규제의 벽을 계속 유지하기는 어려워진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기업들의 압력이다. 현재는 주로 암호화폐 투자자와 핀테크 스타트업 중심이지만, 대기업들이 본격적으로 스테이블코인 기반 결제·정산 시스템을 도입하기 시작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비용 절감 효과가 재무제표에 가시적으로 반영되기 시작하면, 정치권도 금융권의 이해관계만을 대변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역설적인 것은 중앙은행들 스스로가 CBDC(중앙은행 디지털화폐) 개발에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테이블코인의 부상에 맞불을 놓겠다는 의도이겠으나, 이는 디지털 화폐의 시대가 불가역적으로 도래하고 있음을 중앙은행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다.
◆ 은행도 적이 아닌 주역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시각 전환이 필요하다. 스테이블코인의 확산이 반드시 은행의 몰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은행이 이 흐름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면 새로운 수익 모델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글로벌 선도 은행들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 JP모건은 자체 스테이블코인인 JPM코인을 기업 간 결제에 활용하고 있으며, 씨티그룹과 HSBC 등도 디지털 자산 인프라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들은 스테이블코인을 위협으로 보는 대신, 기존의 신뢰 자산과 고객 네트워크를 결합해 새로운 금융 서비스를 설계하는 방향을 택했다.
국내 은행들도 마찬가지다. 스테이블코인 기반의 결제·정산 인프라 구축, 디지털 자산 수탁 서비스, 유동성 관리 솔루션 등 은행만이 제공할 수 있는 영역에서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방어에 급급한 사이 글로벌 빅테크와 핀테크에 시장을 내주는 것이 오히려 더 큰 리스크다.
◆ 혁신의 설계자로 나서야 할 때
역사를 돌아보면, 기득권이 혁신을 영구적으로 저지한 사례는 드물다. 인터넷 뱅킹이 처음 등장했을 때도, 카드결제가 확산될 때도, 핀테크가 부상했을 때도 기존 금융권의 저항은 거셌다. 그리고 결국에는 제도화가 이루어졌고, 선제적으로 적응한 기관이 시장을 주도했다.
스테이블코인도 예외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반대가 아니라 실효성 있는 제도 설계이며, 그 설계의 주역으로 은행과 중앙은행이 함께 나서야 한다.
변화를 막으려는 자가 아닌, 변화를 이끄는 자가 다음 시대의 금융을 장악한다. 그것이 진정한 금융 전문가와 금융기관의 역할일 것이다.
원대식 한양대학교 경제금융학부 겸임교수 · Wavebridge 전략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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