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램지어의 역사 왜곡과 한국 정부의 '뒷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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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1-03-06 07:07   수정 2021-03-07 20:28

[특파원 시선] 램지어의 역사 왜곡과 한국 정부의 '뒷짐'

[특파원 시선] 램지어의 역사 왜곡과 한국 정부의 '뒷짐'

눈에 불을 켜고 강제성 부인 빌미 찾는 우익세력…재발 가능성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존 마크 램지어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자발적 매춘부로 규정한 논문 '태평양 전쟁의 성계약'으로 일으킨 논란이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있다.

국제사회의 여러 전문가는 태평양 전쟁의 성계약이 학술 논문으로서의 기본을 갖추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결국 애초 논문을 실을 예정이었던 법경제학국제리뷰(IRLE) 측이 저자의 소명을 요구하는 등 램지어의 글이 엉터리였다는 평가가 내려지는 분위기다.

학계의 상호 비판 속에 명문대 교수 간판을 동원한 역사 왜곡 시도가 국제사회의 공감을 얻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국 정부의 대응을 함께 돌아볼 필요가 있다.

램지어가 선두에 선 국제 여론전은 불발이지만, 그가 내놓은 것과 유사한 주장은 이미 일본 사회에 꽤 확산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일본 측이 전쟁 중 벌어진 여성에 대한 인권 침해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죄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일본 여론이 이와 동떨어진 방향으로 흐른다면 램지어 논문 사건과 같은 상황은 언제든 재발할 우려가 있다.

일본군 위안부 동원 과정에서 이뤄진 가해의 역사를 부정하려는 시도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있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가 2선 중의원 의원 시절이던 1997년 '일본의 전도(前途)와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의 모임'을 만들어 교과서에 실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관련 기술(記述)을 문제 삼은 것이 대표적이다.

이 모임은 교과서의 위안부 관련 내용이 이른바 '자학사관'(自虐史觀)에 토대를 둔 것이라며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과한 '고노(河野)담화'(1993년 8월 발표)를 비난했다.

2012년 12월 아베가 재집권한 후 우익 세력의 준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2013년 11월 우익 성향의 산케이(産經)신문이 '고노담화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공적인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고노담화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취지로 의도적인 질문을 담은 여론조사를 하는 등 고노담화 흠집 내기를 시도했고 이에 일본 정치권이 동조하는 위태로운 상황으로 치달았다.

2014년 초 기자는 한일 외교를 담당하던 당시 한국 정부 고위 관계자에게 이런 움직임에 정부가 대응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닌지, 역사 왜곡을 시도하지 못하도록 피해자들이 생존해 있는 동안 사실관계를 제대로 조사해 놓을 필요는 없는지 등을 질문한 적이 있다.



당시 우익 세력은 고노담화 발표 전인 1993년 7월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 16명을 대상으로 실시된 청취 조사 보고서를 보면 증언 내용에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보여주는 자료는 여러 연구자에 의해 다수 확인됐음에도 지엽적인 부분 등을 이유로 시비를 거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 고위관계자는 증언을 듣는 것에 관해 '한달 뒤에 들어보면 또 말이 바뀐다'며 고령의 피해자를 상대로 조사 등의 작업을 하기는 어렵다는 인식을 내비쳤다.

그는 또 '아베 총리가 (총리를) 하면 얼마나 하겠냐'며 '시간이 가면 정권이 바뀐다'고 반응하기도 했다. 아베는 그 후로도 6년 넘게 총리로 재직했다.

한국 정부의 다른 당국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전쟁 중 여성의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관한 문제라며 일본 측이 이 문제를 건드려서 국제사회의 공감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당시 한국 당국자들의 인식은 상당히 낙관적이었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역사 왜곡 시도는 이어지고 있고, 그러는 사이에 한국 정부에 등록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생존자는 15명으로 줄었다.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참혹성을 이야기할 산 증인이 없어진 후에 벌어질 역사 왜곡에 대응할 준비가 충분한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현재 당국자도 위기의식이 부족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정영애 여성가족부 장관은 논란이 확산하기 전에 램지어의 논문을 확인하고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다가 비판이 확산하자 뒤늦게 전문가 간담회를 열어 램지어가 "연구자로서 기본을 갖추지 못했다"고 말했다.

여성가족부는 2019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집 영문판을 완성해놓고도 개인 정보와 저작권 관련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공개하지 않아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일본 우익이 눈에 불을 켜고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잔혹성을 부인할 빌미를 찾고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예나 지금이나 안이함에는 큰 변화가 없어 보인다.



한국 정부가 램지어 논문이 촉발한 사태에 사실상 뒷짐을 지고 있었던 것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2015년 한일 외교장관 합의 등을 의식한 행동으로 추정된다.

합의 이후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한국 정부의 목소리는 현저하게 작아졌다.

특히 최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게 배상하라는 한국 법원 판결이 확정되면서 일본 정부가 반발하는 와중에 한국 정부는 갈등 요소에 개입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최영삼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달 브리핑에서 "민간학자 개인의 학술적인 연구 결과에 대해 우리 정부가 구체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현 단계에서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당시 합의에 대한 찬반은 엇갈리지만, 한국 정부는 "양국 정부 간의 공식적인 합의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문재인 대통령)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램지어 교수의 논문을 비롯한 역사 왜곡 시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합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2015년 위안부 합의는 한일 양국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하고,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사업을 착실하게 실시하는 것을 문제 해결의 전제 조건으로 내걸었기 때문이다.



램지어 교수의 논문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와 존엄을 현저하게 훼손하고 마음의 상처를 악화시킨다는 것은 자명하다.

2015년 합의 정신에 비춰보면 한국 정부가 램지어 교수의 터무니없는 논문에 제대로 대응할 것을 일본 정부를 비롯한 여러 관계국에 촉구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혹시라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대외 활동이 위안부 문제 합의 위반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일본 정부가 10억엔(약 105억원)을 냈으니 그것으로 위안부 문제는 해결됐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일본 우익 세력의 논리에 말려든 것과 다름없다.

물론 일련의 사태에서 가장 비난받아야 할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세력이다.

하지만 피해자의 인권을 옹호하고 역사 왜곡에 맞서야 할 한국 정부의 대응에 부족함이 없었는지도 돌아봐야 한다.

sewonlee@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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