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도광산 '가혹한 노동환경'…에도시대부터 태평양전쟁까지

입력 2022-02-01 06:00  

일본 사도광산 '가혹한 노동환경'…에도시대부터 태평양전쟁까지
에도시대엔 부랑자 등 동원…"3∼5년 정도밖에 버티지 못해"
조선인 징용 태평양전쟁 땐 "매일 사고로 하루하루가 공포"



(도쿄=연합뉴스) 김호준 특파원 = 일본 정부가 1일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식 추천하는 사도(佐渡)광산은 에도(江戶)시대부터 태평양전쟁 기간까지 가혹한 노동환경으로 악명이 높았다.
사도광산 연구 권위자인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 등이 작년 12월 24일 출판한 '탐욕의 땅, 미쓰비시 사도광산과 조선인 강제동원'에 따르면 에도시대(1603∼1868년) 사도광산에 동원된 노동자들은 3∼5년 정도밖에 버티지 못했다.
정 연구위원 등은 책에서 "진폐증을 불러오는 가혹한 환경, 광산 지형을 변형시킬 정도의 중노동, 그리고 낙반과 매몰 등의 사고로 대부분이 생명을 잃었기 때문"이라며 "40세를 넘을 때까지 살아남은 광부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고 기술했다.



일본 니가타(新潟)현 사도섬에 있는 사도광산은 에도시대 금 광산으로 유명했으며, 에도 막부(幕府)의 자금줄 역할을 했다.
에도 막부는 부랑자 등을 사도광산으로 끌고 와서 일을 시킨 것으로 전해진다.
메이지(明治)시대(1868∼1912년)에 사도광산은 일본 정부에 의해 기계화 시설이 도입돼 근대 광산으로 탈바꿈했다.
일본 정부는 1896년 미쓰비시(三菱) 합자회사에 사도광산을 매각했다. 1918년 미쓰비시가 미쓰비시광업을 설립한 이후에는 미쓰비시광업으로 소속이 변경됐다.
근대 광산으로 변신 이후에도 사도광산의 노동환경은 열악했다.
일본의 사도광산 연구 권위자인 히로세 데이조(廣瀨貞三) 일본 후쿠오카(福岡)대 명예교수가 작년 10월 23일 온라인 세미나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사도광산에선 1935년 7월께 하루 1명꼴로 사고를 당했다.
히로세 교수가 당시 일본 신문 기사를 인용해 "1935년 7월부터 사도광업소에선 '낙토화(樂土化) 운동'이 시작됐다"며 "이 시점에 하루 평균 1명꼴로 사고가 빈발해 '안전위원'의 경계로 1개월 평균 3∼5명 정도, 다시 말해 10분의 1 정도로 (사고를) 줄이는 것이 (낙토화 운동의) 목적이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사도광산의 노동자는 980여명이었다. 조선인이 사도광산에 동원되기 전이었는데 낙반 등의 사고로 일본인의 희생도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인이 사도광산에 동원되기 시작한 시기는 1939년 2월이다. 히로세 교수는 이때부터 태평양전쟁(1941∼1945년)이 끝날 때까지 적어도 2천명(연인원 기준) 정도의 조선인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했다.
사도광산은 태평양전쟁 기간 주로 구리와 철, 아연 등 전쟁 물자를 캐는 광산으로 활용됐다.
히로세 교수에 따르면 '운반부'와 '착암(바위에 구멍을 뚫음)부' 등 갱도 내 위험한 작업에 조선인이 투입되는 비율이 높았다.
조선인 노동자 '모집' 당시 근로조건이 전달되지 않은 문제와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차별 등이 원인이 돼 노동쟁의가 발생하기도 했다.
히로세 교수는 사고광산 노동자의 노동시간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지만, (일본의) 패전이 가까워짐에 따라 장시간 노동의 경향이 강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회사 측이 '30% 증산'을 독려했기 때문이다.
조선인 노동자는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도주를 시도했다.
1940년 2월부터 1943년 6월까지 3년 4개월 동안 사도광산에서 도주한 조선인 노동자는 148명이었다. 1940년 2월부터 1942년 3월까지 동원된 조선인 1천5명 기준으로 보면 약 15%가 도주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사도 광산에 동원됐던 조선인 임태호(1997년 사망) 씨도 당시 도망자 중 한 명이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2019년에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임 씨는 지하에서 광석을 채굴하는 일을 했는데 하루하루가 공포 그 자체였다는 취지로 증언했다.
그는 매일 같이 낙반 사고가 있어 '오늘은 살아서 이 지하를 나갈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졸이며 살았다고 한다.
조선인 노동자 중 사망자가 모두 몇 명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정 연구위원 등이 저술한 책에는 사도광산 측의 보고 자료를 인용해 1942년 3월까지 동원된 조선인 1천5명 중 10명이 사망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발간 자료를 보면 '강제동원 피해조사 등 지원위원회'가 판정한 사도광산 피해자는 148명으로 이 중 9명은 현지에서 사망했다.
후유증을 신고한 피해자 73명 중 30명은 진폐증으로, 15명은 폐 질환으로 신고했다.
정 연구위원은 지난달 27일 '일본 세계유산 등재 추진 사도광산의 강제동원 역사 왜곡'을 주제로 열린 온라인 세미나에서 "한국 정부가 가진 사도광산 징용 피해자 명부에는 148명만 들어있지만, 이들은 총동원 인원의 일부일 뿐"이라며 "정부 차원에서 중단된 피해 신고업무를 재개해 사도광산의 피해가 낳은 후유증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는 지난달 28일 조선인 징용 현장인 사도 광산을 유네스코에 세계유산으로 추천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이날 오전에 열리는 각의(閣議·우리의 국무회의 격)에서 사도 광산 세계유산 추천을 승인할 예정이다.
hoju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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