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어중간한 것'들의 위기

입력 2013-09-02 17:17   수정 2013-09-03 00:00

무너진 중산층 의식
양극화 키우는 '경제민주화'

현승윤 중소기업부장 hyunsy@hankyung.com



라디오나 전화기, TV 한 대만 갖고 있어도 “우리 집은 부자”라고 말했던 때가 있었다. 경제개발이 시작된 1960년대와 70년대 얘기다. 동네 사람들은 홍수환 선수가 나오는 권투를 보기 위해 TV가 있는 집으로 몰려갔다. 열심히 일하고 절약해 TV 하나 장만해야겠다는 의욕이 불탔다. 1980년대 들어서는 그 대상이 자동차와 아파트로 바뀌었다.

‘중산층 의식’은 이런 과정에서 생겼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성취감은 가난을 이겨낼 수 있다는 자긍심을 북돋웠다. 한국 국민의 70%가량이 “나는 중산층”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한때 일본 국민의 90% 이상이 중산층이라고 자부했던 것처럼….

하지만 이 공식은 깨졌다. 벽걸이 TV나 대형 냉장고는 물론 승용차나 아파트조차 중산층을 상징하는 물건이 아니다. 콩나물 값까지 아끼며 주택대출 이자를 갚아가는 사람들을 우리 사회는 ‘하우스푸어’라 부르기 시작했다.

월급을 받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중산층이라고 자부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쥐꼬리 연봉’을 받고 있다고 자학한다. “회사에서 받은 월급으로 애들 교육 다 시키고, 자동차 할부금 갚고, 주택대출 이자까지 내고 있다”며 행복해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사교육비 내고, 할부금 갚고, 주택대출 이자 내고 나면 남는 게 없다”며 죽는 소리를 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외환위기 이후 ‘나도 잘릴 수 있구나’하는 불안 심리, 고속성장한 대기업이나 금융회사에 다니는 사람들과 비교해 초라해진 연봉, 주택가격 하락으로 애써 쌓아 놓은 부(富)가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 노후생활 준비 부족 등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런 불안심리를 교묘히 부추기는 곳이 정치권이다. 한국 사회를 ‘양극화 사회’로 규정한 뒤 빈곤층에는 혜택을, 부자에게는 세금 징수와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중산층은 “우리도 서민”이라고 맞장구를 친다.

정부는 지난달 초 세제개편안을 발표하면서 중산층에 대해 ‘거위 깃털을 아프지 않게 뽑는 수준’으로 가볍게 과세한다고 했다가 호되게 당했다. 결국 중산층 기준을 높이는 쪽(연봉 기준 3450만원→5500만원)으로 물러섰다. 중산층 범위는 그만큼 좁아졌다.

남들의 부러움을 살 만한 6억~9억원 주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요즘 “우리만 소외당했다”고 불만을 터뜨린다. 취득세 인하 혜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중견기업 대표들은 지난주 박근혜 대통령과 가진 오찬간담회에서 ‘중견기업법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종업원 수가 300명이 넘거나 연간 매출이 1500억원을 돌파한 순간부터 중소기업이 받는 혜택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대기업 규제를 받는 탓이다. 일감 몰아주기 과세와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 공공시장 중소기업 우대 등 최근 만들어진 각종 ‘경제민주화법’ 때문에 중견기업들이 받는 불이익은 더 커졌다.

‘전체를 같이 끌어올리기’보다는 ‘상층과 하층을 나눠 분할통치’하는 이분법적 시각이 확산될수록 중간지대에 있는 것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중간(於中間)한 처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중산층, 중견기업, 6억~9억원 주택 보유자들이 ‘어중간한 것’들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은 결국 혜택을 더 많이 받는 하위집단을 자처하게 되고, 두터움을 자랑했던 중산층 의식은 더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점에서 경제민주화법은 신중히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현승윤 중소기업부장 hyuns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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