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엔 PGA투어서 우즈와 한판 겨뤄야죠"

입력 2016-12-28 18:47  

도전 2017! (5) 유럽투어 신인왕 오른 왕정훈

성공신화 쓴 '골프 유목민'
초등생 때 필리핀 골프 유학…한국·필리핀서 따돌림 '상처'
17세에 중국투어 상금왕 올라…올해 유럽투어 최연소 2연승

잡초같은 생존력 키운 인내심
하루 5시간씩 퍼팅 연습 '독종'…뙤약볕서 등에 화상 입기도
내년 PGA대회 5개 이상 출전…우승컵 들어올리는 게 목표



[ 이관우 기자 ] “제가 2주 연속 우승한 걸 누구보다 기뻐하셨는데….”

2016 유럽프로골프(EPGA)투어 신인왕 왕정훈(21·사진)의 얼굴에선 특유의 ‘챔피언 미소’가 부쩍 줄었다. 할아버지 병문안을 위해 고향인 김제에 다녀왔다는 그를 지난 23일 경기 성남시 분당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왕정훈은 “나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많이 안 좋으셨다”며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눈물이 쏟아져서 그냥 돌아나왔다”고 했다. 왕정훈은 “내년엔 미국프로골프(PGA)투어에서 우승컵을 가져올 거라고 말씀드리려 했는데 그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

◆유럽투어 최연소 2연승 돌풍

여린 감성을 지닌 그가 정글 같은 유럽투어에서 성공신화를 써낸 힘은 뭘까. 왕정훈은 지난 5월 트로피하산2세 대회와 아프라시아뱅크모리셔스오픈에서 ‘2연승’을 거머쥐며 깜짝 스타로 떠올랐다. 유럽투어 최연소 2연승 기록이었다.

“이전까지는 존재감이 없었어요. 한국투어에서는 성이 왕씨인 데다 중국투어에서 상금왕에 오른 게 알려져서 그런지 다들 중국 선수로 알았으니까요. 골프밖에 잘하는 게 없고, 그 길만이 내가 갈 길이라는 확신이랄까, 그게 없었으면 견디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는 이미 5년차 프로골퍼다. 열일곱이던 2012년 중국프로골프(CPGA)투어에 데뷔한 그는 그해 상금왕에 오르면서 중국 골프계를 발칵 뒤집어놨다. 이후 아시안투어와 한국프로골프(KPGA)투어, 중국투어, 유럽투어를 오가는 고된 ‘골프 노마드’ 생활이 이어졌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필리핀으로 골프유학을 떠난 것까지 합치면 유소년기의 거의 절반을 해외에서 보낸 셈이다.


◆생존력 강한 ‘골프 노마드’

필리핀과 한국에서 따돌림을 당한 아픈 기억은 그에게 잡초의 생존력을 선물했다.

“필리핀 유학 도중 한국 대회에 출전했는데 중학교 3학년이 중학교 1학년으로 출전했다고 항의가 들어오는 바람에 4년간 자격정지를 받은 적이 있어요. 유학생활로 유급이 돼서 어쩔 수 없는 거였는데 강력한 우승 후보가 갑자기 나타나자 집중 견제를 받은 거죠.”

돌아간 필리핀에서도 문제가 생겼다. 4개의 아마추어 대회를 싹쓸이하자 이번엔 필리핀 국가대표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한국과 달리 꽤 많은 월급을 받는 그들의 지위가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현지 괴한들한테 밤길 조심하라는 얘기까지 들었을 정도니, 말 다 했죠. 그래서 제3국으로 가자고 결심한 거예요.”

중국투어 상금왕이 되자 아시안투어 시드권이 들어왔다. 2014년 21위였던 상금순위가 2015년 9위까지 올라갔다. 더 큰 무대로 진출할 기회를 기다렸다. 하지만 갑자기 쇼트퍼팅 입스가 왔다. 1m짜리 쇼트퍼트를 놓치는 일이 잦아지자 퍼트 자체가 공포스러웠다. 아버지의 권유로 집게그립으로 바꿔봤다. 쇼트퍼팅은 물론 롱퍼팅까지 좋아졌다. 자신감도 함께 살아났다. 마침 아프리카에서 열리는 유럽투어 초청장이 왔다.

“아버지가 극구 말렸지만 가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어요. 한국에서도 메이저대회 초청장이 왔는데 포기하고 대기 순번 선수 자격으로 날아갔죠.”

그의 비상을 알린 모로코 트로피하산2세 대회였다. 그는 3타 차 열세를 뒤집는 역전 드라마를 쓰며 생애 첫 승을 따냈다. 이후 모리셔스오픈마저 내리 제패하면서 스스로 ‘왕의 시대’를 알렸다.

◆“타이거 우즈와 진검승부 하고 싶어”

그는 연습을 많이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게으른 천재일까. 왕정훈은 “절대 천재는 아니다”며 “롱게임은 2시간 이내로 연습하는 대신 부상 확률이 적은 쇼트게임 연습에는 시간을 집중 투자한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 왕영조 씨(58)는 “(정훈이가) 인내심을 타고난 것 같다”고 말한다. 필리핀 유학 시절의 일이다. 왕정훈은 시키지 않아도 하루 5시간씩 퍼팅 연습을 했다. 뙤약볕이 옷을 달구면서 등에 화상을 입었다. 왕정훈은 “아직도 그 흉터가 남아 있고 그때 연습 탓인지 등까지 살짝 굽었다”고 말했다.

왕정훈은 내년 1월 EPGA 아부다비챔피언십을 시작으로 2017시즌을 시작한다. 마음은 그러나 벌써 꿈의 무대 PGA로 달려가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우상이던 타이거 우즈가 복귀한 이후부터 PGA에 빨리 가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졌어요. 올해 상금순위로 내년에 메이저대회인 브리티시오픈 등 최소 5개 대회는 출전할 수 있는데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할아버지에게 우승컵을 꼭 안겨드려야죠.”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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