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베트남이 중국을 다루는 법

입력 2017-05-17 18:16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1979년 2월17일 중국군 6만여 명이 베트남을 침공했다. 중국이 실전에 나선 것은 6·25전쟁 이후 처음이었다. 베트남은 국민 총동원령으로 맞섰다. 주력군이 캄보디아 쪽에 배치돼 있어 민병대와 여성들이 전투에 앞장섰다. 중국군은 20만 명까지 병력을 늘렸지만 졸전 끝에 2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한 달 만에 퇴각했다. ‘말 안 듣는 조그만 친구(小朋友)’를 손봐 주겠다던 덩샤오핑은 머쓱해졌다.

190년 전 청나라 때도 그랬다. 베트남 왕이 황제를 칭하자 건륭제(乾隆帝)가 20만 대군으로 침공했다. 베트남군은 수륙 양면작전으로 응수했다. 10만 군사와 전투용 코끼리 100마리를 앞세워 기습전을 펼쳤다. 청군은 거의 전멸하고 건륭제는 망신만 당했다. 송나라와 원나라도 베트남을 침략했다가 쓴맛을 봐야 했다.

베트남은 10세기 독립 이후 중국 역대 왕조와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지만 그때마다 승리했다. 그런 까닭에 민족적 자부심이 유난히 강하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을 제외하고 한 번도 남의 지배를 받지 않은 힘이 여기에서 나온다. 남중국해의 스프래틀리 제도(난사군도)와 파라셀 제도(시사군도)를 놓고 중국과 영유권 분쟁을 벌일 때도 전 국민이 한데 뭉친다.

2011년 5월 중국 해군이 베트남 석유·가스 탐사선의 해저 케이블을 끊었을 때 베트남 전역이 반중(反中) 시위로 들끓었다. 군부는 “중국이 파라셀 제도를 점령하면 우리는 육로로 공격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2014년 5월 중국의 석유시추 장비 설치에 항의하던 베트남군이 다치고 어선이 파손됐을 때도 벌떼같이 들고 일어났다. 중국인 소유 공장들이 잿더미로 변하고 화교들은 탈출했다. 결국 중국 해군은 철수했다.

이처럼 당당하게 맞서는 베트남을 중국은 절대로 가벼이 보지 못한다. 베트남인들도 프랑스와 미국, 중국을 몰아낸 ‘강한 나라의 국민’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디엔비엔푸 전쟁 승리로 프랑스군을 격퇴한 보응우옌잡, 몽골군을 대파한 쩐흥다오 등을 지금도 추앙한다. 독립 영웅 호찌민의 ‘이불변 응만변(以不變 應萬變)’도 베트남 정신의 뿌리다. 변화하지 않고 타협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원칙을 기반으로 수만 가지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한다는 의미다.

그 힘으로 베트남은 통일 후 10여 년 만에 ‘도이모이(쇄신)’ 정책으로 시장경제를 과감하게 도입했다. 중국이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의 광기를 거쳐 30여 년 뒤에야 개혁·개방에 나선 것과 대조적이다. 중국을 대하는 베트남의 자세를 보면서 새삼 우리 외교의 현주소를 돌아보게 된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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