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맥] 중소기업 연쇄부도 악순환의 주범, 약속어음 폐지해야

입력 2017-07-04 20:06  

중기 자금난 가중시키는 약속어음

2015년 기준 어음결제 1069조원…중소기업 20%가 거래
자금회수에 약 4개월…납품사가 부도위험 떠안는 구조
'상환청구권 없는 팩토링제도'로 연쇄부도 고리 끊어야



[ 김낙훈 기자 ]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 주요 거래 관행인 ‘약속어음’이 새 정부에서 단계적으로 폐지될 전망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이던 지난 4월 초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를 방문해 “약속어음제도를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에서도 약속어음 폐지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 등 업계에서도 전자어음 활성화, 상환청구권 없는 팩토링제도 도입 등 약속어음 대체 방안을 건의하고 있다.

1997년 말 외환위기 당시 한국은 기업의 연쇄 부도를 겪었다. 몇몇 대기업 몰락을 신호탄으로 수많은 중견·중소기업이 문을 닫았다. 원인 중 하나가 약속어음제도였다.

제품을 납품하고 받은 약속어음이 휴짓조각으로 변하면서 돈을 벌던 회사도 문을 닫아야 했다.


그 후 경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약속어음제도 폐지 주장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중소기업의 20%는 여전히 약속어음으로 거래하고 있다. 수십 년간 지속된 이 제도의 문제점은 무엇이고 대안은 무엇일까.

최덕호 덕성산업기계 사장은 1993년의 일을 잊지 못한다. 시골에서 열아홉 살에 상경해 중소기업에서 쇠를 깎는 일을 배운 그는 29세 때인 1984년 문래동에서 창업했다. 10평짜리 월세 공장을 얻었고 국산 중고 선반과 밀링을 한 대씩 샀다. 조금씩 성장하던 그에게 1993년 청천벽력 같은 일이 닥쳤다. 중견기업에서 주문받아 제품을 납품하고 약속어음을 받았는데 발주 기업이 부도가 난 것이다. 5억원짜리 약속어음은 순식간에 휴짓조각이 됐다. 한 해 매출에 버금가는 금액이었다. 당시 그는 서울 강서구에 있는 연립주택 지하에 보증금 300만원, 월세 30만원을 주고 살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2004년에는 뇌경색이 찾아와 반신마비가 됐다. 눈물겨운 노력 끝에 재활에 성공했고 2005년에야 마침내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 그는 지금도 “약속어음은 빨리 폐지돼야 한다”고 외치는 수많은 중소기업인 중 한 명이다. 그러나 그가 겪은 피해는 중소기업 현장에서 지금도 진행형이다.

자금경색 역기능 커

올초 부도난 대형 서적도매업체 송인서적 협력업체들도 약속어음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대부분 출판사인 이들 협력업체는 송인서적에서 납품대금을 최장 7개월짜리 약속어음으로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인터파크가 송인서적을 인수하면서 일부 채권을 갚기로 했지만 피해를 온전히 보상받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기업 간 거래는 제품 개발과 생산, 영업, 계약을 거쳐 거래처에 납품하고 대금을 받음으로써 완료된다. 아무리 제품을 잘 만들어 납품하더라도 판매대금을 제때 회수하지 못하거나, 과도한 비용을 들여서 회수하면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다. 납품대금을 받는 방법에는 현금과 외상거래 등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외상거래에는 주로 약속어음이라는 수단이 쓰인다. 약속어음은 결제와 신용이라는 순기능이 있는 반면 수·위탁기업 간 결제 지연의 역기능도 있다.

하지만 실제 거래에서는 역기능이 훨씬 많다는 게 중소기업인들의 주장이다. 특히 결제기간이 길어 이를 받은 중소기업은 자금 회수에 상당한 시일이 걸린다. 어음 만기가 장기화할수록 자금 경색을 초래할 뿐 아니라 할인료 등 금융비용이 커진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어음을 통해 자금을 회수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평균 113일에 달했다. 어음을 받는 데 39일, 발행어음의 결제 기간이 74일이었다. 8월 초에 납품하면 11월 말에나 대금을 회수한다는 뜻이다. 그동안 힘없는 납품기업은 원자재 인건비 등을 현금으로 지급해야 함은 물론이다. 더 큰 문제는 부도 위험이다. 발행인의 신용 위험이 수취인에게 전가되기 때문이다.

오진균 중소기업중앙회 정책총괄실 선임은 “약속어음제도는 외상매출에 따른 ‘기한의 이익’은 구매기업이 보는 반면 어음 할인료나 구매기업의 부도 위험이 판매기업에 전가되는 비정상적인 제도”라고 지적했다. 그는 “어음 활용에 따른 가장 심각한 문제로 상환청구권을 들 수 있다”며 “이로 인해 납품 중소기업은 어음 부도 시 연쇄 부도 위험에 처하는 심각한 상황에 놓인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어음 발행자가 만기 결제일에 대금을 지급하지 못하면 어음이 부도나는데 납품기업이 부도어음을 은행에서 할인받았다면 은행은 발행자뿐만 아니라 ‘그 어음을 할인한 기업’과 ‘중간에 배서한 모든 기업’에 상환을 청구한다. 이 기업 중 누구라도 책임지지 못하면 모든 기업이 다 부도날 수도 있다. 연간 어음 결제 규모(2015년 기준)는 교환 기준으로 1069조4510억원에 달하고 이 중 부도금액은 0.23%인 2조4720억원에 이른다.

어음 결제 대체 수단으로 외상매출채권담보대출 등이 운영되고 있으나 상환청구권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어 한계가 있다. 2016년 국회 정책토론회에선 중소기업인들이 어음제도와 외상매출채권담보대출제도 폐지를 요구하기도 했다.

中企 73% "폐지하자"

공정거래위원회의 ‘하도급거래 서면실태 조사’에 따르면 현금 결제 확대, 대체 결제 수단 등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음 거래가 전체 거래의 20% 수준을 차지하고 있다. 제조업체 하도급 대금 중 어음 결제 비중은 2011년 30.2%에서 2014년 22.6%로 떨어졌으나 여전히 20%를 웃돌고 있다. 이 기간 현금 결제 비중은 48.7%에서 51.2%로 올라갔다. 외상매출채권담보대출은 16.2%에서 12.5%로 떨어졌다. 기업구매전용카드 기업구매자금대출 구매론 등이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다.

중소기업계는 새 정부의 어음제도 개편 방안을 주시하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새 정부 방침인 어음제도의 단계적 폐지는 상환청구권 없는 대체 제도 도입 등 개선 방안 마련과 함께 추진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이나 서구 선진국은 대부분 일정한 외상기간을 거친 뒤 현금 결제하거나 외상매출채권 팩토링으로 해결하는 게 보편화돼 있다”며 “한국처럼 납품기업이 모든 책임을 지는 나라는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중소기업계는 어음제도에 대해 27.0%만이 ‘유지’하자는 의견이고 73.0%의 압도적 다수는 ‘폐지’하자는 의견(2016년 중소기업중앙회 조사)이다.

전자어음 일원화도 필요

중소기업중앙회는 ‘상환청구권 없는 팩토링제도’ 도입을 희망하고 있다. 발행자의 부도 위험을 구매기업과 납품기업이 보험 형식으로 분담해 납품대금 미회수나 연쇄 부도 위험을 없애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이다. 아울러 (종이) 약속어음을 전자어음으로 일원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2005년부터 전자어음제도가 도입되고 2014년부터 전자어음 의무발행 대상을 확대하면서 전자어음 이용은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해 교환 기준으로 약속어음 중 종이어음이 74.5%인 797조2690억원, 전자어음은 25.5%인 272조1820억원을 차지했다.

하지만 어음제도를 폐지하더라도 거래업체 간 협상력 차이에 따라 여러 형태의 부당한 결제 조건이 생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연쇄 부도를 막는 장치다. 상대방의 잘못 때문에 여러 업체가 한꺼번에 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우리는 외환위기 때 이런 문제점을 수없이 목격했다. 이제는 이런 불합리한 흐름을 끊을 때가 됐다.

김낙훈 중소기업전문기자 n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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