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한 '美 노동운동 대부'…위인들의 위선, 왜 계속되나

입력 2026-04-07 17:35   수정 2026-04-08 00:03

요즘 미국은 전설적인 노동운동가 세자르 차베스의 흔적 지우기에 한창이다. 사후 33년 만인 지난달 뉴욕타임스(NYT) 탐사 보도를 통해 10대 소녀들을 상대로 저지른 성폭력 사실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차베스가 주로 활동한 미국 캘리포니아 일대 동상들이 철거되고, 그의 얼굴을 담은 벽화는 덧칠되거나 종이로 가려졌다. 로스앤젤레스(LA)시는 차베스 생일을 기리던 공휴일을 폐지하고, 명칭을 ‘농장 노동자의 날’로 바꿨다.

차베스는 미국 노동운동의 상징이자 히스패닉 사회의 구심점이었다. 미국농장노동자연맹(UFW)을 창설하고, 불매운동과 비폭력 평화행진 등을 통해 히스패닉 농장 노동자의 저항 운동을 이끌었다. 오랫동안 그의 생일이 여러 지역에서 공휴일로 기념된 이유다.

사회와 공공 복리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 주변 약자에게 성폭력을 행사하는 사례는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다. 공적 위대함은 왜 사적 도덕성을 보장하지 못하는 걸까.

범죄심리학에 따르면 사회적 명성과 자아의 간극 자체가 성범죄를 추동할 수 있는 요인이 된다. 차베스는 미국 사회에서 라틴계 노동자와 약자, 정의의 상징으로 간주됐다. 시간이 흐를수록 실존 인물보다 ‘신화적 브랜드’에 가까워졌다. 밖에서는 추앙받지만 정작 개인의 내면은 그 기대를 감당하지 못한 채 불안정해지며 주위 약자에게 왜곡된 욕망을 투영했다는 설명이다.

둘 사이의 심리적 간극을 메우려는 과정에서 사적 지배 욕구도 생길 수 있다. 프로파일러 출신인 배상훈 우석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공적 세계에서는 완벽해야 하고 약한 모습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좁은 관계에서 보상을 찾는다”며 “그 관계는 종종 위계적이고 폐쇄적이어서 상대를 동등한 인격체가 아니라 자기 결핍을 메우는 도구로 취급하기 쉽다”고 말했다. 성적 착취 역시 이런 지점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동운동 내부의 가부장·권위주의 문화도 배경으로 거론된다. 특히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중심 문화가 강한 노동운동 현장에서는 범죄 사실이 더 쉽게 묵인될 수 있었다는 의견이 나온다. 차베스 주변 여성 운동가들은 성폭력 사실을 인지하고도 “내가 평생을 바친 농장 노동자 운동도 상처를 입을 것”이라며 해당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왜곡된 권력 의지의 결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측근에게 정서적 학대를 가하고 반대파를 탄압하며 권력에 집착하던 행동이 주변 소녀들에 대한 성범죄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혜인 기자 he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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