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자 눈에 생겨난 균열…'타인의 삶'이 던지는 질문

입력 2026-07-21 18:12   수정 2026-07-22 01:09

감시자 눈에 생겨난 균열…'타인의 삶'이 던지는 질문


베를린 장벽 붕괴 전, 동독 비밀경찰이 예술가 부부가 사는 집안 곳곳에 도청장치를 달고 이들을 감시하는 소재의 연극 ‘타인의 삶’이 조용한 인기몰이 중이다. 2024년 초연 이후 재연 중인 이 작품은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영화 ‘타인의 삶’(2007)을 손상규 연출이 연극으로 각색했다. 감시가 길어질수록 두 예술가의 삶과 선택을 지켜본 비밀경찰 비즐러의 마음엔 균열이 가기 시작하고, 작품은 체제와 양심 사이에서 세 인물이 하는 선택을 집요하게 따라간다.

영화가 워낙 촘촘한 서사와 긴장감으로 사랑받은 만큼 손 연출 역시 “이미 훌륭한 영화를 왜 연극으로 만들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제작진에 던질 정도였다. 하지만 무대로 재탄생한 ‘타인의 삶’은 영화의 긴장감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다양한 연극적 장치가 빠른 장면 전환을 소화해냈고 카메라가 포착하던 미세한 감정은 조명과 배우의 절제된 움직임으로 새롭게 살아났다. 원작에 기대기보다 연극만의 문법으로 밀도 높은 무대를 구현해낸 것이다.

공연은 비즐러가 한 망명 사건과 관련된 인물을 심문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앉아. 양손 허벅지 밑에, 손바닥을 아래로”. 짧고 단호한 지시가 이어질 때마다 심문 대상자의 몸은 더 움츠러든다.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 거듭 항변하지만 비즐러는 흔들리지 않는다. 잠을 재우지 않은 채 같은 질문을 되풀이한다.

결국 극도로 지친 대상자는 비즐러가 원하는 답을 내놓고 만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장면이 작품에서 심문실인 동시에 강의실이라는 데 있다. 비즐러는 대상자를 몰아붙이다가 돌연 객석으로 시선을 돌려 심문 기술을 설명한다. 관객은 어느새 그의 강의를 듣는 비밀 경찰학교 학생이 된다.

공연은 관객과 배우가 공유하는 ‘연극적 약속’ 위에서 움직인다. 최소한의 무대 장치만으로 심문실과 극장, 드라이만의 집, 비밀경찰 사무실이 쉼 없이 교차하고, 배우들은 무대 가장자리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다 극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빠른 시공간의 변화에도 흐름이 끊기지 않는 것은 비즐러가 내레이터 역할까지 맡아 관객을 자연스럽게 다음 장면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손상규 연출은 최근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며 “재현을 뛰어넘어 연극적 상상력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경험하는 재미가 있을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의 말처럼 장면의 강약과 리듬은 치밀하게 조율돼 있다. 110분 동안 수십 차례 장면이 바뀌지만 산만하지 않고, 비즐러의 내면이 흔들리는 과정도 설득력 있게 쌓인다. 여러 번 촬영과 편집을 거친 영화의 리듬과 비교해도 크게 밀리지 않는 완성도다. 이번 시즌에는 초연을 이끈 배우들과 새로운 배우들이 함께 무대에 올랐다. 공연은 9월 13일까지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이어진다.

최한종 기자 onebel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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