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가 꿈꾼 하버드생 "깜깜이 시장 보고 창업 결심"

입력 2026-07-31 18:28   수정 2026-08-01 00:00


경기 파주 접경지역에서 나고 자란 소년이었다. 비가 오면 논두렁에서 소금쟁이를 잡고, 맑은 날이면 이웃집 포도밭을 뛰어다녔다. 중학생 때는 고양 일산신도시를 오가며 호수공원 같은 ‘계획된 도시 속 자연’의 매력에 눈을 떴다. ‘언젠가 비무장지대(DMZ)가 열려 공원이 되면 그 풍경을 설계하는 조경가가 되겠다.’ 안정록 루트릭스 대표(사진)가 조경의 길을 꿈꾸게 된 계기다.

안 대표는 고려대 환경생태공학부에서 조경을 공부하며 조경연구회장을 맡았다. 이후 미국 하버드대 건축대학원(GSD)에서 조경설계 석사 과정을 밟았다. 조경가를 꿈꾸던 소년은 왜 스타트업 창업가가 됐을까.
◇“조경수는 고급화, 산업은 제자리”
루트릭스는 전국 800여 개 나무 농장의 데이터를 축적해 건설사와 조경업체, 개인 수요자를 연결하는 플랫폼이다. 나무 가격 비교부터 견적, 운송, 검수까지 조경수 유통 전 과정을 데이터 기반으로 관리한다. 안 대표는 “국내 조경 시장은 매물 정보도 시세도 불투명했던 20년 전 부동산 시장과 비슷하다”며 “축적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조경 산업의 새로운 기준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최근 서울 강남권 신축 아파트는 단지 하나에 조경수 비용만 100억원에 이를 정도로 조경이 고급화 경쟁력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정작 조경 산업은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에 머물러 있다. 원하는 나무를 찾으려면 전국 농장에 일일이 전화를 돌려야 하고, 전국 나무 농장의 규모와 수종을 집계한 데이터도 사실상 전무하다. 생산자는 판로를 찾지 못하고, 수요자는 필요한 나무를 제때 구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된다.

안 대표는 이 같은 ‘깜깜이 시장’에서 사업 기회를 발견했다. 참신한 사업 모델을 인정받아 퓨처플레이와 소풍벤처스 등의 투자를 유치했고, 데이터 기반으로 조경수 유통 시장을 바꾸는 데 나섰다.

가장 어려웠던 일은 데이터를 모으는 작업이었다. 안 대표와 직원들은 4년 넘게 전국 나무 농장을 직접 찾아다녔다. 그는 “사업 초기에는 구글 위성지도로 농장을 찾은 뒤 나무에 명함을 걸어두고 올 정도였다”며 “국내 나무 거래 시장은 연간 4조원 규모지만 상당수 농장은 홈페이지조차 없다”고 말했다.
◇아파트·골프장서 먼저 ‘러브콜’
이 같은 노력은 성과로 이어졌다. 루트릭스는 서울 서초구 메이플자이와 반포 래미안 원베일리 등 주요 아파트 단지에 조경수를 공급했다. 경기 여주의 해슬리나인브릿지CC 등 골프장 프로젝트도 수행했다. 누적 매출은 110억원을 넘어섰다.

회사는 앞으로 재건축·재개발 과정에서 갈 곳을 잃은 나무를 새로운 수요처와 연결하는 사업도 확대할 계획이다. 최근에는 한국은행 강남본부 리모델링 과정에서 이전이 필요했던 수십 년 된 소나무와 단풍나무를 수목원 등으로 옮겼다. 안 대표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나무의 가치를 신속하게 평가하고 운송·식재까지 연결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설명했다.

회사 이름 ‘루트릭스(Rootrix)’에는 ‘조경 산업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겠다’는 뜻을 담았다. 안 대표는 “사회가 발전할수록 사람은 자연과 휴식을 더 갈망하게 된다”며 “도심에서도 자연을 더 쉽게 누릴 수 있도록 나무 농장과 시공업체를 가장 효율적으로 연결하는 플랫폼이 되겠다”고 말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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