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상수도 및 원수 가격은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선진국의 3분의 1 수준으로, 공급 원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값싸고 안정적인 물 공급에 익숙한 우리에게 ‘물 부족’은 좀처럼 현실적인 위기로 다가오지 않는다. 특정 지역에서 가뭄으로 제한 급수를 시행한다는 뉴스를 가끔 접할 뿐, 많은 국민은 일상에서 물 부족으로 큰 불편을 겪은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국제물협회(IWA)에 따르면 서울의 1인당 하루 물 사용량은 206L로 미국 주요 도시보다는 적지만 베를린(115L)과 코펜하겐(103L) 등 유럽 대도시와 비교하면 2배 가까이 많다. 기업이 처한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ESG(환경·사회·지배구조)와 지속가능성 리스크가 강조되면서 수자원 관리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만, 수도꼭지만 틀면 값싸고 깨끗한 물이 끊임없이 공급되는 환경에 익숙해져 있는 탓에 물 부족으로 공장 가동이 중단되는 등의 차질을 겪은 국내 기업은 아직 많지 않다.
한국, 특히 새로운 첨단 산업단지가 들어설 서남권의 물 안보 수준을 진단하려면 복잡한 고차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미래 강수량의 변화와 계절별 편중, 집수 구역 면적 같은 자연적 조건은 물론, 물을 저장하고 필요한 곳으로 이동시키는 댐과 도수관로 등 물리적 인프라 시설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수요 측면의 변화도 놓쳐서는 안 된다. 농업·공업·생활용수의 총량과 계절적 이용 패턴을 파악하는 것은 기본이다.
여기에 기후변화로 강물이 마르는 건천화를 막고 수생태계를 보전하기 위한 하천유지용수, 도심 소하천을 맑고 풍부하게 유지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공급하는 환경용수까지 물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다양해지고 있다. 따라서 ‘물이 충분한가’라는 질문은 단순히 댐에 얼마나 많은 물이 저장돼 있는지를 따지는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다양한 사회적·생태적 요구에 맞는 수질의 물을 지속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지를 종합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문제는 기후위기가 현실화하는 미래에도 이 수량을 언제나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느냐다. 기상청의 ‘지역 기후변화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향후 전남 지역의 연간 강수량은 다소 증가할 수 있지만 비가 전혀 오지 않는 ‘최대 무강수 지속기간’도 길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비가 올 때는 폭우가 쏟아지고 오지 않을 때는 극심한 가뭄이 장기간 이어지는 강수의 양극화가 심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최근 호남 지역에서는 가뭄의 빈도와 강도가 세지며 산업계에 경고등이 켜졌다. 2022~2023년 호남 대가뭄 당시 광주의 식수원인 동복댐은 저수율이 18%대까지 급락해 제한 급수 직전의 비상사태를 맞았다. 주암댐 역시 저수율이 17%까지 떨어져 물 공급 중단 위기에 직면한 여수·광양 산단의 석유화학 및 제철 기업은 공장 가동 중단 가능성에 대비해 연간 정비 일정을 수개월 앞당겨야 했다. 국내 최대 농업용 댐인 나주댐마저 저수율이 30%대로 내려가면서 봄철 모내기를 앞둔 농가도 극심한 용수 부족을 겪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취수량도 5년 동안 각각 33%, 21% 증가했다. 반도체와 피지컬 인공지능(AI), AI 데이터센터를 포함하는 3대 메가 프로젝트가 계획대로 추진될 경우 국내 기업의 물 수요는 더욱 가파르게 증가할 전망이다. 공급의 불확실성은 커지는데 수요는 늘어나는 구조다. 결국 댐을 늘리고 관로를 연결하는 ‘공급 확대’만으로는 물 안보 문제를 풀기 어렵다. 이제 산업정책의 무게중심을 수요 관리까지 넓혀야 한다.
우선 기업은 용수 재활용과 ‘무방류 시스템’ 구축 등 물 사용량을 줄이기 위한 투자에 적극 나서야 한다. 2021년 대만에서 극심한 가뭄을 경험한 TSMC는 새롭게 건설 중인 미국 애리조나 사업장에 폐수를 외부로 거의 배출하지 않고 공장 내부에서 100%에 가깝게 재순환시키는 ‘근접 무방류’ 시스템 도입을 추진 중이다.
현대자동차도 인도 첸나이 공장에 무방류 시스템을 구축해 외부 취수 의존도를 거의 제로 수준으로 낮췄다. 삼성전자 역시 미국 텍사스 테일러 사업장의 용수 확보를 위해 수처리 및 재이용 설비에 수천억 원을 투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도 기업 차원의 적극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왜곡된 물 가격을 정상화할 필요가 있다. 산업용수가 끊기면 하루 수백억원, 수천억원의 생산 차질이 발생하지만, 당장 절약하고 재활용해서 얻는 재무적 편익이 워낙 낮아 기업 입장에서는 용수 재활용 설비에 수백억원을 투자할 유인이 약하다. 물 가격 현실화는 단순한 요금 인상의 문제가 아니다. 물이라는 희소자원의 가격 신호를 정상화하는 문제다. 수도 요금을 현실화해 기업들이 물을 ‘비싸고 귀한 자원’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동시에, 수처리 설비 투자에 대한 과감한 세제 혜택과 인센티브를 제공해 기업의 자발적인 체질 개선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가뭄 등 비상 상황에서 물을 어떤 용도에 우선 배분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정교한 보상 체계를 미리 설계해야 한다. 가뭄 피해가 집중되는 매년 봄철은 여름철에 확보한 댐의 수위가 가장 낮아지는 시기인 동시에, 농촌의 모내기로 인해 물 수요가 폭발하는 시기다. 이때 산업용수와 농업용수, 식수 사이에서 한정된 수자원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원칙이 없다면 첨단산업 투자 확대가 오히려 지역사회와 기업 간 ‘물 갈등’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
2021년 대가뭄을 겪은 대만의 대응은 참고할 만하다. 대만은 반도체 산업을 살리기 위해 농민을 일방적으로 희생시켰다는 비판이 제기된 뒤, 가뭄이 예상될 경우 모내기 전에 휴경을 예고하고 농가 순이익의 100% 이상을 보전하는 ‘상향된 휴경 보상제’를 법제화했다. 또한 대기업으로부터 수자원 부담금을 걷어 농업 인프라의 누수를 개선하는 ‘농-산 상생 모델’을 마련했다. 우리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도 봄철 가뭄으로 산업용수와 농업용수 수요가 충돌할 상황에 대비해 명확한 물 배분 원칙과 정교한 보상 체계를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김태한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KoSIF)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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