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유영국 화백 탄생 110주년 기념전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를 다녀왔습니다.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이 새롭게 선보이는 ‘한국 근대 거장전’ 시리즈의 첫 프로젝트입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민주화와 압축 성장의 시간을 지나며 예술을 삶으로 실천한 작가들을 조명합니다.
유영국은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꼽힙니다. 1963년 한국이 국제 미술 무대에 처음 본격적으로 발을 디딘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김환기 등과 함께 참가했습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 남짓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10년밖에 되지 않았고, 경제는 여전히 원조에 기대고 있었습니다. 국내에 물감 회사가 막 생겨나던 때였고, 외국 미술 재료 수입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화가들은 지구 반대편 브라질까지 갔습니다. 같은해 12월에는 파독 광부 1진이 서독으로 떠났습니다. 예술도 노동도, 살길을 밖에서 찾아야 했던 시대였습니다.
전시장에서 마주한 유영국의 산은 실제 자연 풍경이라기보다 작가 안에 있던 산에 가까웠습니다. 그는 세계에서 배운 조형 언어를 그대로 복제하지 않았습니다. 그 언어를 흡수해 자신의 산을 다시 그렸습니다.
한국 미술의 근대화는 압축의 역사였습니다. 서구가 수백 년에 걸쳐 지나온 전통과 근대, 추상과 국제화의 과정을 한국은 한 세대 안에 뛰어넘어야 했습니다. 축적보다 압축에 가까웠습니다.
한국 경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올라서는 데 반세기 남짓 걸렸습니다. 후발주자였던 한국에는 선명한 답안지가 있었습니다. 선진국이 먼저 간 길이 있었고, 키워야 할 산업과 배워야 할 기술이 분명했습니다. 정부는 전략산업을 정했고, 자본과 노동, 교육을 한 방향으로 집중시켰습니다.
한강의 기적은 목표가 명확할 때 한국 사회가 얼마나 빠르게 달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문제는 그 방식의 유효기간이 끝나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추격형 성장은 앞서 달리는 선두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런데 반도체, 배터리, 콘텐츠 같은 분야에서 한국은 이미 선두권에 올라섰습니다. 인공지능(AI) 전환기에는 산업의 표준도, 최종 승자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베껴 쓸 답안지가 없습니다.
성장 여건도 달라졌습니다. 생산연령인구는 줄고 있고 잠재성장률은 2% 아래로 낮아지고 있습니다. 과거처럼 노동과 자본을 더 많이 투입해 속도를 내는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투입할 자원 자체가 줄어드는 시대가 됐기 때문입니다.
압축 성장의 그림자는 부동산 시장에도 짙게 남아 있습니다. 압축 성장기 한국에서 주택은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성장의 과실을 저장하는 가장 익숙하고 안전한 창고였습니다. 고성장과 집값 상승이 함께 가던 시기에는 합리적인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가계 자산의 약 70%가 부동산에 묶였습니다. 저성장과 고령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지금, 이 구조는 새로운 제약이 되고 있습니다. 자산이 부동산에 잠기면 소비 여력은 줄어듭니다. 혁신산업으로 흘러가야 할 자본도 제한됩니다. 은퇴 가구는 집은 있지만 현금이 부족한 상황에 놓입니다. 수도권 집중과 세대 간 자산 격차도 더 커집니다.
오늘의 부동산 문제는 집값이 오르느냐 내리느냐 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압축 성장기에 만들어진 자산 배분 구조를 저성장·고령화 시대에 맞게 어떻게 바꿀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성장 부재가 아니라 성장 구조의 문제입니다.
방향은 분명합니다. 첫째, 부동산에 묶인 자산의 물길을 바꿔야 합니다. 고령 가구의 주택자산을 노후소득으로 바꾸는 유동화 제도를 넓혀야 합니다. 묶여 있는 자본이 자본시장과 혁신산업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세제와 금융 구조도 다시 설계해야 합니다.
둘째, 주택정책의 기준을 바꿔야 합니다. 인구 감소 시대의 공급은 단순한 물량 확대가 아니라 공간과 기능의 재배치여야 합니다. 실제 생활권과 일자리, 고령화된 가구 구조에 맞는 주택 공급이 필요합니다.
셋째, 국가 자원 배분의 기준도 다시 세워야 합니다. 과거의 성공 방정식이 아니라 앞으로 30년의 인구와 산업 구조 변화에 맞춰 자본, 토지, 교육, 재정의 흐름을 새로 짜야 합니다.
쉬운 과제는 하나도 없습니다. 정답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유영국은 서구의 기하추상을 배웠지만 그대로 따라 그리지 않았습니다. 자신만의 언어로 산을 다시 그렸습니다.
물감조차 부족하던 시대에 지구 반대편으로 향했던 대담함과 남의 답을 복제하지 않고 자기 안의 산을 그려낸 독창성. 지금 한국 경제와 부동산 시장에도 그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더 이상 답안지가 없는 시대라면, 이제는 우리가 새로운 성장의 공식을 써야 합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김효선 KB국민은행 WM스타자문단 부동산수석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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