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잃어가는 아버지와 매끄러워지는 AI…김애란이 본 두 모습

입력 2026-09-01 10:33  



김애란에게는 오랫동안 ‘젊은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2002년 스물셋에 등단해 스타 작가가 됐고 2013년엔 이상문학상을 역대 최연소 수상했다. 그런 그가 문단에서 작품활동을 한 지도 어느덧 25년에 가까워지고 있다. 김애란이 7년 만에 펴낸 두 번째 산문집 <그랬다고 적었다>에는 전작을 낸 뒤 켜켜이 쌓인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특히 이번 산문집에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가 부쩍 많다. 어머니 이야기로 문을 열었던 전작과 달라진 점이다. 치매를 앓는 아버지와 마주 앉아 직접 인터뷰까지 했다. 김애란은 최근 한국경제 아르떼와의 인터뷰에서 “작품을 쓰기 위한 취재는 아니었다”며 “흩어져 사라질지 모르는 시간을 기록해, 어디에 발표하지 않더라도 간직하고 훗날 형제들과 나누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부모 이야기는 김애란 문학의 오래된 뿌리다. 첫 단편집 제목부터 <달려라, 아비>였다. 다만 젊은 시절의 김애란에게 아버지는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어려운 존재였다. 실제 아버지의 삶을 그대로 옮기기보다 상상과 환상을 통해 멀리 돌아갔다. 김애란은 “아버지를 직면하면 내가 다칠 것 같았다”며 “나를 보호하기 위해 이야기를 조금 더 허구적으로 가져갔다”고 말했다.

김애란은 오랜 시간 허구와 상상을 통해 아버지를 우회해 만난 끝에, 이제는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그래서 산문을 통해 있는 그대로 그를 담으려고 했다. 그는 “이번엔 조용한 응시와 이해 쪽으로 렌즈를 바꿔 썼다”고 했다.

그렇게 책 안으로 들어온 아버지는 오래 일해온 사람의 자부심과 후회, 미래에 대한 아쉬움을 함께 품은 사람이다. 오랫동안 이발소를 운영한 그는 의식이 흐려진 뒤에도 눈을 감은 채 허공에 대고 가위질을 했다. 무엇을 가장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는 ‘일이 가장 하고 싶지’라고 답했다. 다만 약간의 시차를 두고 ‘그런데 손이 떨려서 어려울 것 같아’라고 덧붙일 수밖에 없었다. 누워서도 가족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눈가부터 촉촉해졌다.



그가 아버지의 시각에서 바라본 세상은 뜻밖에도 인공지능(AI)이라는 동시대 화두와도 포개진다. 김애란은 아버지 발병으로 속을 앓아가던 시기 챗GPT와의 대화를 통해 위로를 받던 순간을 돌아본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존재라고 하니 여러모로 현명하고 좋은 답을 갖고 있을 것 같아서였다.”

묘한 대비가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김애란이 가까이에서 지켜본 아버지는 조금씩 말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같은 시기 AI는 언어모델로서 놀라운 속도로 말을 익히고 있었다. 김애란은 처음부터 둘을 대비하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글을 묶으면서야 인간의 불완전함과 쇠락 반대편에서 갈수록 매끄러워지는 기술의 모습이 한 시기에 겹쳐 있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그는 “인간이라서 아프고, 죽고, 모자라고, 부족하고, 실수하면서 일어나는 일의 풍경들과 AI 프로그램의 매끄러움, 완전함, 속도와 같은 것들이 대비돼 보였다”라고 설명했다.

최근 김애란은 한 방송에서 AI와 사람의 다른 점을 묻는 말에 ‘망설임’을 꼽았다. 사람의 주저함 속에는 힘겹게 지켜내는 배려와 품위가 있다는 취지였다. 이 발언이 화제가 된 뒤 AI 관련 강연과 행사 요청이 쏟아졌지만 대부분 사양하고 있다. 자신을 AI 전문가로 내세우고 싶지 않아서다.

하지만 그는 AI가 언어를 다루는 작가가 외면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호기심과 기대, 불안과 걱정을 다 갖고 지켜보고 있어요. 어떤 입장을 딱 정해 놓고 보기보다는 걱정이 조금 더 큰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죠.”.



이번 산문집은 그의 문학관으로 시작한다. 그는 몇 해 전부터 자신의 ‘농도’를 조금씩 옅게 만들려 한다고 썼다. 소설을 쓰다 자신이 비워진 자리에 다른 사람이 서고, 다른 생이 차오르는 듯한 순간을 경험한 게 계기다. 그가 요즘 새로 꾸는 꿈은 역설적으로 ‘내가 되지 않는 꿈’이다. 작품활동 초기에 몰두했던 1인칭의 세계에서 3인칭으로의 변화. 김애란은 “내가 지금 서 있는 자리를 꽂아놓고 산문집을 출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표제작 <그랬다고 적었다>에선 문학에 대한 김애란의 자신감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여기서 “처음엔 그저 필요에 의해 시작했을 뿐인데,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는 삶을 상상하기 어렵다”며 “내게 ‘글쓰기’와 ‘글 읽기’는 직업이거나 취미이기 이전에 삶의 방식이며 훗날 직업적 의미를 잃게 된다 해도 나는 이 존재 방식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고 적었다.

확신이 보인다고 하자 김애란은 “대체로 쩔쩔매면서 쓴다”며 웃었다. “독자분들은 결과물만 보시니까 제가 의젓한 자세로, 어떤 기개를 갖고 쓴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제가 그 글이 마음에 든다면 그것은 확신 때문이 아니라, 불안과 혼란 끝에 한 줌에 쥐게 된 자세와 마음이어서 그런 것 같아요. 말을 세워 놓고 제가 기대는 것이죠.”

김애란은 책 첫머리에 “‘그랬다’고 적는 동안 떠올린 얼굴, 당신께”라고 썼다. 그는 “제 주요 독자층은 제 또래가 많다”며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여러 어려움을 같이 겪어나가겠구나, 혹은 누군가는 나보다 먼저 겪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신도 그랬겠군요’, ‘그때 마음은 어땠나요’ 하는 마음으로 독자들의 얼굴이 포개졌다”고 말했다.



책이 시종 무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마지막에는 코트 수선에 얽힌 허풍 섞인 일화도 등장한다. 김애란은 “과장은 이야기를 맛깔나게 만들어주는 것 중 하나”라며 “앞의 이야기가 조금 무겁다 보니 나가는 문에서는 독자들이 웃으면서 책을 덮었으면 했다. 초기작에서 보인 ‘명량한 얼굴’의 흔적을 넣었다고나 할까요”라고 했다.

김애란은 책을 읽는 일을 ‘한 집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에 비유한 적이 있다. 그리고 집을 나섰을 때 그 공기가 몸에 배일 것이라고 했다. 이번 산문집이라는 집을 나선 독자에게 어떤 냄새가 배어 있을 것 같으냐고 묻자, 그는 한참을 고민한 뒤 ‘물비린내’라고 답했다.

강가나 바다에 다녀온 사람의 옷에 자신도 모르게 남는 냄새처럼, 이번 책에는 흐르는 시간의 흔적이 배어 있을 것 같다는 뜻이었다.

“세월은 강물과 같다고 하잖아요. 굳이 표현한다면 시간의 냄새, 물비린내나 바깥바람 냄새 같은 게 아닐까요.”.

최한종 기자 onebel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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