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작품을 감상할 때면 흔히 예술가의 삶과 겹쳐 읽고 싶은 유혹이 들기 마련이다. 화가가 걸어온 삶이 으레 그림에 묻어난다고 생각해서다. 물론 꼭 그런 건 아니다. 스페인 인상주의 화가 호아킨 소로야(1863~1923)의 어린 시절은 훗날 그린 찬란한 그림과 거리가 멀었다. 인상주의 거장 모네는 그를 ‘빛의 대가’라 불렀지만, 그의 탄생은 상실의 어둠에서 시작했다. 불과 두 살에 고향에 창궐한 콜레라로 부모를 잃었기 때문이다.
파리·뉴욕이 열광한 ‘스페인의 빛’
당시 스페인은 세계를 호령했던 제국의 영광이 저물고, 빈곤과 문맹이 만연한 가난한 나라였다. 부모 없는 어린아이가 꿈꿀 만한 미래는 당연히 총천연색 화가보단 잿빛 소년공이 가까웠겠지만, 천만다행으로 소로야는 이모 부부에게 거둬졌다. 부부는 조카를 친자식처럼 아꼈고, 그림에 대한 재능까지 알아봤다. 자물쇠공이던 이모부는 소로야에게 붓을 쥐어줬고, 열다섯 무렵 미술학교에 들어간 소로야는 온 힘을 다해 그림을 그렸다. 장학금으로 이탈리아 로마 유학의 기회도 얻었다. 두 살배기 고아에겐 좀처럼 그려지지 않았을 화가의 삶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냈다.
마드리드에서 숱하게 마주친 벨라스케스의 그림, 로마에서 감상한 고전 명화, 프랑스 파리 여행을 갔을 때 접한 인상주의 화풍 등 젊은 소로야는 당대의 예술을 흡수했다. 하지만 소로야의 회화를 만든 결정적인 것은 일련의 여행을 마친 후 돌아온 고향의 풍광이었다. 눈부신 태양이 비추는 고향 스페인 발렌시아 해변을 담아낸 소로야의 외광회화는 밝고 생명력이 충만했다.
‘발렌시아의 해변’(1908), ‘말 목욕’(1909) 같은 작품은 부서지는 파도 속에 스며든 햇살, 젖은 피부 위로 번지는 반사광이 아름답다. ‘슬픈 유산’(1899) 등을 출품한 파리 만국박람회에선 그랑프리(대상)을 받으며 인상주의의 고장 프랑스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다. 온 유럽에 이름을 알린 그는 대서양을 건너 미국 뉴욕으로 향하며 또 다른 삶의 분기점을 맞이하게 된다.

뉴욕에서의 시간은 스페인·라틴아메리카 문화에 매료돼 있던 미국의 철도재벌가의 젊은 청년 아처 밀턴 헌팅턴과의 만남이 시발점이다. 런던에서 본 소로야의 그림에 매료된 헌팅턴은 이듬해 자신이 세운 ‘히스패닉 소사이어 미술관&도서관(HSA)’에서 소로야의 전시를 열었다. 고작 한 달 남짓한 전시에 16만 명 구름인파가 몰렸다. 헌팅턴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뉴욕에서 일찍이 이런 일은 없었다”고 적었을 정도였다. 당시 미국 대통령 하워드 태프트는 소로야에게 초상화를 의뢰했다.
소로야는 헌팅턴과 그가 세운 HSA와의 인연을 이어 나갔다. 소로야의 걸작으로 이베리아 반도 각지의 풍경을 8년에 걸쳐 그려낸 14점의 ‘스페인의 비전’ 연작을 헌팅턴의 의뢰로 완성한 게 대표적이다. 이런 점에서 오는 22일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막하는 ‘스페인 미술 500년: 빛과 어둠의 연대기’ 전시에서 소로야의 그림은 적잖은 의미를 갖는다. HSA의 컬렉션이 아시아 지역에서 처음 선보이는 첫 전시인 만큼, 소로야와 미술관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전시를 읽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초상화로 파고드는 소로야의 화업
이번 전시에는 소로야가 1914년 그린 ‘마누엘 페레스 데 구스만 이 보사 리아뇨 아우바레(헤레스 데 로스 카바예로스 후작)’가 걸린다. 한 근엄한 남자를 그려낸 실내 초상이라 널리 알려진 소로야의 대표적인 해변 풍경을 기대했다면 다소 의외일 수 있다. 그러나 그림 속 남자의 정체를 알면 물음표는 느낌표로 바뀐다. 헤레스 데 로스 카바예로스 후작은 당대 스페인에서 손꼽히는 희귀 문서 수집가로 헌팅턴은 그의 장서 컬렉션을 사들이며 HSA의 기반을 일궜다.

소로야는 이 작품을 ‘스페인의 비전’을 제작하던 시기에 그려냈다. 헌팅턴과의 인연을 상징하는 또 다른 작품인 동시에 야외에 이젤을 세우고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외광회화로 ‘빛의 대가’라는 수식어 뒤에 가린 소로야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정치인과 지식인 등 초상화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던 만큼, 이 한 점을 통해 익히 알던 수준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소로야의 작품세계를 느껴볼 수 있다.
소로야를 만나러 갈 생각이라면 오는 17일까지 정가(성인 기준 2만3000원) 대비 약 35%를 할인한 1만5000원에 티켓을 구매할 수 있는 ‘라스트 얼리버드’를 챙겨볼 만 하다. 소로야를 포함해 프란시스코 고야,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등 스페인 미술사 500년을 대표하는 작품 95점을 더불어 감상할 수 있어서다. 전시는 내년 1월 20일까지로, 얼리버드 티켓의 사용 기간은 11월 29일까지다.
유승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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