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역폭메모리(HBM)에 이어 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eSSD)를 차세대 성장축으로 키우려는 SK하이닉스가 사업 확장과 주주가치 보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손자회사 솔리다임의 미국 증시 상장 가능성이 확실시되면서 '4중 중복상장' 논란에 따른 주주가치 희석 우려가 커지고 있어서다.
솔리다임은 회사가 2020년 인텔의 낸드·SSD 사업을 인수하면서 출범한 법인이다. 인텔이 보유 기업용 SSD 경쟁력과 SK하이닉스의 낸드 기술·생산 역량을 결합해 메모리 사업의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전략이었다. 솔리다임의 핵심 사업은 데이터센터와 서버에 들어가는 고용량 eSSD다. 특히 AI 데이터센터를 겨냥한 대용량 저장장치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SK하이닉스도 최근 솔리다임 사업이 AI 데이터센터용 고용량 eSSD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밝혔다.
AI가 커질수록 SSD가 중요해지면서 솔리다임의 가치도 높아지고 있다. AI 데이터센터에서는 수천~수만 개의 그래픽처리장치(GPU)가 대규모 데이터를 끊임없이 읽고 쓴다. 문제는 AI 모델과 데이터셋이 커질수록 저장해야 할 데이터도 함께 늘어난다는 점이다. 특히 AI 추론이 확산하면 상황이 더 복잡해진다. 생성형 AI가 한 번 답을 내놓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와 계속 상호작용하고 에이전트가 여러 작업을 수행하면서 저장·검색해야 할 데이터가 증가한다.
이 때문에 AI 데이터센터에서는 GPU와 HBM만 빠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지에서 필요한 데이터를 얼마나 빠르고 효율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지도 중요해지고 있다. 솔리다임이 AI용 고용량 eSSD를 전면에 내세우는 배경이다. 로이터도 솔리다임이 서버·클라우드·데이터센터용 eSSD를 공급하고 있으며 AI 애플리케이션을 겨냥한 고용량 저장장치에 집중하고 있다고 전했다.
솔리다임의 eSSD를 좀 더 쉽게 설명하면 HBM이 AI가 계산할 때 필요한 데이터를 빠르게 꺼내 쓰는 초고속 작업공간이라면 eSSD는 AI가 처리해야 할 방대한 데이터를 저장해 놓는 창고에 비유할 수 있다. AI 모델이 커지고 추론량이 늘어날수록 이 저장공간의 규모와 속도도 중요해진다. '솔리다임'이라는 회사 이름도 저장장치 사업과 직접 연결돼 있다. SK하이닉스는 '새로운 솔리드스테이트 패러다임'을 만들어내겠다는 의지를 회사 이름에 담았다.
SK하이닉스는 AI 데이터센터 시장의 폭발적인 수요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솔리다임의 생산능력과 기술 경쟁력 확보를 위한 투자 필요성을 지속해서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관건은 투자재원 마련 방식이다. SK하이닉스는 자체 자금을 활용하는 방안을 포함해 외부 자본 등 다양한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다만 여러 사업에서 동시에 투자 수요가 발생하는 만큼 회사 전체의 투자계획과 재무 상황, 자본 배분 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외부 자본을 활용할 경우 자체 자금을 사용하는 방안과 비교해 기존 주주의 경제적 가치에 미치는 영향을 충분히 살펴 판단하겠다고 강조했다. 최근 시장에서 제기된 솔리다임의 중복상장 가능성과 이에 따른 기존 주주가치 훼손 우려를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인공지능(AI) 기반 투자정보 플랫폼 에픽AI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이날 전 거래일 대비 5.05% 내린 176만8000원에 거래를 마쳤다. SK스퀘어는 7.56% 하락한 110만원에, SK㈜는 5.40% 내린 57만8000원에 장을 마쳤다.
SK그룹의 지배 구조를 살펴보면 시장의 반응은 납득이 간다는 평가다. SK그룹의 반도체 부문 지배 구조는 SK㈜(지주사)→SK스퀘어→SK하이닉스→AI컴퍼니(SK하이닉스의 자회사)→솔리다임으로 이어진다. 이 중 SK㈜와 SK스퀘어, SK하이닉스가 모두 상장돼 있는 데다 SK하이닉스는 미국에도 상장돼 있다. 솔리다임까지 포함하면 '4중'에 달하는 중복 상장 문제가 제기되는 이유다.
이미 SK㈜와 SK스퀘어의 경우 이익 상당액이 SK하이닉스에서 비롯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솔리다임 상장으로 외국인 투자자 등이 하이닉스에서 외부로 더 빠져나가게 되면 본진 역할을 하는 SK하이닉스의 기업 가치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게 중복 상장을 우려하는 측의 주장이다.
투자 전문가들로 구성된 비영리단체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지난 8월 솔리다임 상장설과 관련해 "국내 공정거래법의 3단 제한 규제를 피하려고 해외 법인을 통해 지배 구조 피라미드를 확장하는 것은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외로 수출하는 행위"라며 SK하이닉스에 상장 계획을 철회할 것을 촉구한 바 있다.
SK하이닉스 주주 입장에선 솔리다임 상장으로 외부 투자자가 늘어나면 SK하이닉스의 솔리다임 지배력이 떨어진다는 점이 문제다. AI 컴퍼니의 지분율이 희석되기 때문이다. 결국 솔리다임 이익이 과거보다 적게 SK하이닉스 실적에 반영된다는 의미다.
SK하이닉스의 한 주주는 "SK는 계열사를 키운 뒤 별도 상장하는 방식으로 기존 주주가치를 희석시키는 일을 반복했다"며 "기술력만 믿고 투자했는데 핵심 사업이 또 다른 상장사로 빠져나가면 기존 주주는 무엇을 믿고 투자해야 하느냐"고 꼬집었다. 또 다른 주주는 "엄청난 영업이익을 거뒀다면서 왜 또 계열사를 쪼개느냐"며 "노조환원보다 주주환원이 먼저"라고 지적했다.
SK하이닉스는 "어떠한 방안을 검토하더라도 장기적인 기업 가치와 주주 가치 제고를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겠다"며 "향후 구체적인 방안을 검토하게 될 경우 이사회 차원에서 재무적·사업적 영향을 면밀히 살피고 관련 규정과 절차를 충실히 이행하겠다"고 했다. 또한 "기존 주주에게 미치는 영향과 필요한 주주 보호 방안도 함께 검토하고 충분히 설명하겠다"고 덧붙였다.
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memor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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