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수소환원제철 등 국가 전략 산업의 탈탄소 전환을 위해 추진 중인 원자력 기반 전력직접구매(PPA) 제도 도입에 대해 불가 방침을 밝혔다. 가장 저렴한 기저 전력인 원전을 특정 대기업에 독점 공급할 경우, 한국전력의 전력구입비 부담이 가중돼 일반 국민과 타 제조업체의 전기요금 인상으로 고스란히 전가된다는 이유에서다.
9일 박수민 국민의힘 의원실이 기후에너지환경부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기후부는 원자력 기반 전력직접구매(PPA) 등 전용 전력조달에 대해 "특정 사용자가 저원가 발전기를 독점하면 타 소비자에게 요금 부담을 전가하고 형평성 문제를 유발한다"며 사실상 반대 입장을 밝혔다. 기후부는 앞서 지난달 초 내부 토론에서도 철강업체를 위한 원전 PPA 등 도입 여부에 대해 '불가' 방침을 잠정적으로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철강은 자동차·조선·건설 등 전 제조업을 떠받치는 ‘산업의 뼈대’다. 특히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본격 시행을 앞두고 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수소환원제철 전환은 국가 수출 경쟁력 유지와 글로벌 초격차 신기술 확보를 위해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그러나 수전해 설비 가동에 드는 막대한 전력비용과 신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REC) 부담 등 현실적 난관에 대해 에너지 당국은 '요금 전가 불가'와 '대기업 특혜'라는 장벽을 앞세우고 있다. 특히 철강업에 이를 한번 허용해줄 경우 반도체 등 다른 다소비 업종에서도 같은 요구가 빗발칠 것을 경계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 7일 관계부처 합동으로 이재명 대통령 주재 하에 개최한 ‘K-GX(녹색전환) 국민보고회’에서 포스코의 동남권 수소환원제철 실증 및 수전해 인프라 등을 녹색전환의 '핵심 축'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철강업계의 생사가 걸린 '전력 공급 단가' 해법에 대해서는 "기업투자를 전제로 저렴한 전기의 안정적 공급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원론적 선언에 그쳤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이준호 고려대 교수는 이 대통령에게 "PPA를 통해 전기 가격을 생산단가에 맞춰 공급받을 수 있는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 대통령은 "산업용 지역차등요금제를 시도하고 있긴 하지만, 추가의 차등조치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세부적으로 합리적인 조치가 필요하겠다"고 답했다.

포스코 등 국내 철강업계는 수소환원제철 실증 공장을 착공하는 등 조 단위 탈탄소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러나 수전해 설비 가동에 드는 전력비 부담이 최대 걸림돌로 꼽힌다. 현재 산업용 전기요금은 kWh당 185원에 이른다.
일반 전력망 전기를 쓸 경우 그린수소 인증을 위해 ㎾h당 수십 원에 달하는 신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REC)까지 추가로 사야 해 실질 전력비가 200원대 중후반까지 치솟기 때문이다. 현행 산업용 요금 체계에서 수소 생산단가는 1kg당 1만3500원 이상으로 턱없이 높아 경제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철강업계는 원전 전력을 활용해 REC 구매 부담을 덜고 무탄소(핑크수소) 인증을 받는 전용 PPA(전력구매계약) 도입이 절실하다는 입장이다. 특혜 시비를 줄이기 위해 "원전 정산단가(70원대)가 아닌 현행 산업용 요금(190원)을 전액 부담할 테니, REC 구매 부담만 면제되는 원전 PPA 형태라도 열어달라"는 고육지책까지 주장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반면 전력시장 당국은 "가장 저렴한 기저발전인 원전을 특정 산업 전용으로 떼어주면 전력시장 내 전력구입비가 급증해 일반 국민의 전기요금 인상 압력으로 전가된다"며 공공성과 형평성 차원에서 신중론을 굽히지 않고 있다.
실제로 계속운전을 앞둔 월성 2호기(연간 발전량 약 48억 kWh)를 수소환원제철 전용으로 돌리고 그 빈자리를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으로 대체할 경우, 한전의 연간 전력구입비는 약 3800억원 늘어난다. 이를 전체 전력 소비자가 균등 분담하면 kWh당 약 0.69원의 전기요금 인상 요인이 발생한다. 월평균 335kWh를 쓰는 도시지역 4인 가구 기준 연간 약 2780원의 요금을 추가로 떠안을 수 있다는 의미다.
산업계와 전력·금융 전문가들은 해외 사례처럼 기업의 리스크 분담 수준에 따라 원전 PPA 제도의 설계와 허용 범위를 차등화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자본 투입과 위험 분담 정도에 따라 단순 구매 방식인 일반 원전 PPA부터 원가와 설비 투자비를 분담하는 '공동 분담형 PPA(프랑스식 CAPN)', 발전소 건설 자본을 직접 태우는 '지분투자 모델(핀란드식 망칼라)'로 층위가 나뉘기 때문이다.
이들 모델은 기업이 짊어지는 책임의 무게가 확연히 다르다. 일반 원전 PPA는 건설비 조달이나 공기 지연 리스크를 지지 않은 채 저렴한 원자력 전기만 골라 사는 구조다. ‘체리피킹’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반면 프랑스식 모델은 시장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PPA과는 성격이 다르다. 특정 원전 한 곳과 개별 기업이 마진을 붙여 전기를 사고파는 단순 상거래가 아니라는 점에서다. 대신 산업계가 프랑스 전력공사(EDF)에 대규모 선급 투자금을 대주고 원전 설비의 유지보수 비용과 가동 원가를 장기간 함께 떠안는 ‘공동 분담형 계약’에 가깝다.
나아가 핀란드 방식은 핀란드 방식은 기업이 아예 원전 건설 단계부터 주주로 참여해 자본금을 대는 구조다. 공사가 수년씩 지연되거나 공사비가 폭증하는 위험을 기업이 분담하는 대신 생산된 전기를 원가로 가져가는 방식이다. 결국 기후부가 대국민 요금 전가 우려가 큰 '일반 PPA'에는 선을 긋더라도, 대안적 모델들까지 일괄 차단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기사업법상 전력 인수 특례를 여는 등 제도적 출구를 열어줘야 국가 신규 원전 투자와 산업 탈탄소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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