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예인으로 활동하면서 벌어들인 1년치 수입보다 더 많은 돈이 들어갔죠. 그런데 진짜 투자는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솔직히 겁이 많이 납니다."
40년 넘게 카메라 앞에 섰던 배우 정보석(66)이 화장품 사업가로 변신했다. 이름만 빌려주는 연예인 브랜드 사업이 아니다. 제품 개발에 2년6개월을 매달렸고, 연구개발과 임상시험에 적지 않은 사재를 투입했다. 화장품 용기 업체부터 인쇄 공장까지 직접 찾아다니며 사업을 챙기고 있다. 현재 직원은 2명. 대표 정보석까지 합쳐 3명이 회사를 꾸려가고 있다.
최근 만난 정보석은 명함을 건네면서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명함에 대표이사(CEO)라는 직함을 넣지 않은 이유를 묻자 "민망해서"라며 웃었다. 배우로선 익숙한 이름이지만 사업가로서는 이제 막 첫 발을 뗀 신인이라고 했다.
그가 화장품 사업에 뛰어든 것은 오랜 배우 생활에서 느낀 불편함 때문이다. 촬영을 앞두고 피부를 관리하기 위해 스킨, 세럼, 아이크림, 로션, 크림, 자외선 차단제 등을 차례로 발라야 했다. 제품이 충분히 흡수되지 않으면 메이크업이 밀려 촬영에 지장을 주기도 했다.
"아침 7시에 촬영이 있으면 두세 시간 전부터 일어나 화장품을 발라야 했어요. 친구들과 골프를 치고 샤워를 하고 나면 다른 사람들은 밥까지 먹고 나올 시간에 저는 겨우 준비를 마쳤죠. 이런 번거로움을 줄일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떠올린 것이 여러 단계의 피부 관리를 간소화한 화장품이었다.
"그때는 (출연) 작품이 너무 많았어요. 제품을 개발하더라도 제가 직접 충분히 써보고 확인할 시간이 없었죠. 아무리 회사를 믿어도 제가 써보지 않은 제품을 어떻게 팔겠어요. 결국 마지막 단계에서 접었습니다."
다시 기회가 찾아온 것은 약 3년 전이다. 연기 활동에 상대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묻어뒀던 사업 구상을 다시 꺼내들었다. 글로벌 화장품 제조업자개발생산(ODM) 1위 기업인 코스맥스와 손잡고 기획에 약 6개월, 사용감과 기능을 검증하고 개선하는 데 약 2년이 걸렸다.
그는 개발 과정에서 인공지능(AI)도 적극 활용했다. 챗GPT와 구글 제미나이를 이용해 화장품 성분과 제형, 피부 전달 기술 등을 공부하고, 직접 샘플을 사용하면서 발견한 문제점을 제조사에 전달했다.
"모르는 것은 물어보면 답이 나오잖아요. 샘플을 발라보고 이런 부분이 아쉽다고 AI에 물어본 뒤 개선 방향을 정리해 전달했어요. 다시 샘플을 받아 써보고 또 수정하는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이렇게 제품을 완성하는 데 들어간 돈만 배우로 활동하며 벌어들이는 1년치 수입을 웃돈다는 귀띔. 정확한 투자금은 공개하지 않았지만 반복적인 시제품 제작과 임상시험 비용이 상당했다고 했다.
그는 "보통 작은 회사가 이렇게 많은 샘플을 만들고 수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며 "코스맥스가 개발 과정에서 적극 협력해준 덕분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제품 개발에 대한 집착은 연기할 때와 닮았다. 그는 젊은 시절 작품을 준비할 때 대본에 몰두하느라 제대로 먹거나 잠들지 못해 체중이 60kg대 후반까지 빠졌던 일화를 꺼냈다.
"대본이 나오면 밥도 잠도 못 잤어요. 마음 놓고 침대에 누워 잘 수가 없었죠. 그게 제 성격인데 지금은 화장품으로 옮겨온 겁니다."

다만 남성 전용 브랜드로 시장을 한정하지는 않겠다는 구상이다. 실제 제품 개발 과정에서 진행한 임상시험 참가자의 약 3분의 2가 여성이었다고 한다.
"남성 참가자를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어요. 처음에는 남성 없이 임상을 진행하자는 얘기들도 있었지만 절대 안 된다고 했죠. 남성의 피부 관리 문제를 해결하려고 만든 제품이니까요."
사업 초기 성적표는 나쁘지 않다는 평가다. 정보석에 따르면 지난 5월 판매를 시작한 뒤 초도 생산 물량 5000세트가 약 3~4개월 만에 대부분 판매됐다. 이후 추가 생산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세트 구매보다 단품 구매가 약 3배 많아졌다고 한다. 그는 이를 기존 구매자들의 재구매가 늘어난 결과로 해석했다. 가장 판매가 활발한 제품은 올인원 제품으로, 추가 생산도 이 제품에 집중되고 있다.
정보석은 "생각보다 잘되고 있다"면서도 "아직은 수익을 가져갈 때가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초기 판매 실적보다 중요한 것은 브랜드를 시장에 안착시키는 일이라는 판단이다. 그는 내년 봄 생산 물량을 최소 3만세트 수준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당장은 외부 투자도 받을 생각이 없다. 투자자가 들어오면 제품 완성도보다 매출 확대와 출시 속도를 우선해야 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지금 단계에서 투자를 받으면 제 마음대로 움직이기 어려워져요. 빨리 만들어서 많이 팔자는 요구가 나올 수도 있겠죠. 저는 조금 더디게 가더라도 제대로 만든 제품으로 승부하고 싶어요."
그는 브랜드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만큼 가격 책정에도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고가 원료와 제조 기술을 적용했지만 신생 브랜드라는 점을 고려해 가격을 낮춰 책정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정보석은 "다른 회사 제품과 똑같다면 굳이 제가 만들 이유가 없다"며 "품질을 양보하지 않고 프리미엄 브랜드로 키우고 싶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국내 화장품 수출 전문기업들과 협의를 진행하고 있으며, 해외 유통업체들 의견을 반영해 제품 용량과 용기를 새로 개발하고 있다.
현재 판매 중인 선세럼은 90mL 용량이지만 해외 시장에서는 30~50mL 제품을 선보이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기존 남성 화장품과 차별화한 전용 용기도 개발 중이다.
해외 유통망 확보를 위한 접촉도 이어지고 있다. 정보석은 국내외 유명 유통 채널과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직 구체적 입점 계약이 확정된 단계는 아니지만, 유의미한 논의를 진행 중이라고 했다. 국내에서는 유통망을 무작정 늘리기보다 브랜드의 가격대와 이미지에 맞는 채널을 선택하겠다는 방침이다.
그는 "전국적인 유통망을 가진 업체나 홈쇼핑에서도 협업 제안이 들어오지만 현재 브랜드 방향과 맞지 않아 진행하지 않고 있다"며 "당장 많이 파는 것보다 프리미엄 브랜드로 자리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업 영역도 확대할 계획이다. 현재 탈모 증상 완화에 도움을 주는 기능성 샴푸와 피부 건조를 관리하는 스틱형 제품 등을 개발하고 있다. 내년 여름을 목표로 선스틱 출시도 준비 중이다.
정보석은 "지금은 제품이 세 가지뿐이지만 회사를 지속적으로 운영하려면 제품군을 더 갖춰야 한다"며 "내년부터는 국내외 뷰티 박람회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는 오랜 배우 생활 덕분에 일반적인 신생 화장품 사업가보다 홍보나 거래처 확보에서 유리한 출발선에 서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제가 만나자고 하면 큰 회사에서도 대부분 만나줍니다. 배우로 40년 넘게 활동하면서 쌓은 신뢰 덕분이죠. 이런 것은 일반적인 사업가가 쉽게 얻을 수 없는 혜택이에요."
하지만 반대로 배우가 굳이 사업까지 해야 하느냐는 비판도 감수해야 한다.
그는 "배우로서 오랫동안 사랑받았으면 그에 감사하며 살아야지 왜 또 사업을 하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며 "그런 시선도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했다.
정보석이 사업을 시작한 이유에는 경제적인 목표도 있다. 다만 단순히 개인적인 부를 늘리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오랫동안 사회공헌 활동을 이어왔다. '사랑의열매' 1억원 이상 기부자인 '아너소사이어티'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배우 활동에 따른 수입이 과거보다 줄어들면서 매달 지속해온 기부가 부담스러워졌지만, 기부 규모를 줄이지는 않았던 정보석이었다.
"제가 옷을 안 사 입으면 안 사 입었지, 아무리 힘들어도 그 부분은 줄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갈수록 도움이 필요한 분들이 많아지잖아요. 사업가로 잘돼서 지금까지 해온 일을 더 확대하고 싶은 마음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에게 사업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뜻밖에도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40년 넘게 배우로 살면서는 대본 속 인물을 통해 상대방을 만났지만, 사업에서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대본의 캐릭터를 가지고 사람을 만났잖아요. 지금은 제 속에 있는 진짜를 꺼내서 상대를 대해야 해요. 그게 어렵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합니다."
그는 사업에 대한 불안감을 공부로 해소한다고 했다. 제품 개발 과정에서 더 나은 방법이 있다고 판단하면 상당 부분 진행된 작업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다.
정보석은 "작은 회사가 큰 회사와 마케팅으로 경쟁할 수는 없다"며 "결국 제품력이 가장 중요한 무기"라고 강조했다. 배우 정보석의 이름을 걸고 내놓은 제품인 만큼 품질에 대한 책임감도 크다고도 했다.
"40년 넘게 쌓아온 신뢰에 상처가 생기면 안 되잖아요. 제 이름을 보고 제품을 샀는데 실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아요. 더 공부하거, 더 좋은 제품을 만드는 수밖에 없죠."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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