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새며 즐기는 2030 놀이터
기자가 행사장을 찾은 건 지난 주말(27일) 아침이다. 화창한 초여름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게 행사장 안 분위기는 차분했다. 삼삼오오 둘러앉은 청년들은 밤을 지새운 흔적이 역력했다. 책상엔 부스스한 머리를 한 참가자들이 모여 있었고 책상 사이 마련된 넓은 공간엔 몇몇 참가자들이 침낭을 덮고 잠들어있었다.
(▲사진 = 메이커톤이 진행된 마루180. 무박 2일 동안 참가자들은 RC자동차를 제작한다.)
정해진 시간이 되자 참가자들은 미리 준비된 경기장으로 향했다. 이번 행사의 주제는 RC자동차(Remote Control, 무선 조종 자동차) 올림픽. 각 팀은 미국, 중국, 스위스 등 나라 이름을 팀명으로 차용했다. 나라 대항전인 올림픽처럼 각자의 기량을 겨루고 팀별로 제작한 RC자동차가 선수로 뛴다. 각 종목 순위에 따라 점수가 주어지며 4가지 종목에서 가장 많은 점수를 획득한 팀이 최종 우승이다.
첫 경기는 풍선 터트리기였다. 상대 팀 RC자동차에 붙어있는 2개의 풍선을 먼저 터트리면 승리하는 조건이다. 미국 팀과 중국 팀의 경기를 시작으로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무사히 굴러만 가길 바란다던 한 참가자는 어느새 상대팀을 이기기 위한 전략을 짜내고 있었다. 목청 높여 응원하는 팀도 생겨났다. 웃고 떠드는 사이 경기는 순식간에 끝났다. 메이커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메이커 톤 ‘위드 캠프’에서 볼 수 있던 장면이다.
(▲ 사진 = 올림픽 첫 번째 종목인 풍선 터트리기 경기. 상대방의 풍선을 먼저 터트리는 쪽이 승리한다.)
● 순수 메이커들이 만든, 우리들의 ‘스포츠’
메이커톤은 메이커와 마라톤을 더한 말로 정해진 기간 안에 개발자와 디자이너, 엔지니어 등이 아이디어를 도출해 쓸 만한 물건을 만드는 행사다. 긴 시간 하나의 주제에 집중하면서 몰입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탄생했다. 이날 열린 위드 캠프는 6명의 젊은 청년들이 2015년부터 만들어 온 행사다. 메이커들이 재밌게 놀 수 있는 놀이터 같은 행사를 만들겠다는 취지로 시작했다. 5회째 위드 캠프의 기획을 맡고있는 강하다 씨는 “쓸데없어 보이더라도 만들고 싶은 물건을 마음껏 만들 수 있는 행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물론 국내에도 메이커들을 위한 행사는 존재한다. 정부 기관뿐 아니라 대기업에서도 메이커 육성을 명목으로 여러 가지 메이커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주최 측에선 주제와 기준을 제시하고 메이커들은 이에 따라 물건을 만드는 방식이다. 위드 캠프 메이커 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수개월의 회의를 거쳐 어떤 주제로 무엇을 만들지를 정하고 참가자들을 모집한다. 하지만 참가자들은 위드 캠프에 대해 기존 메이커 톤과는 확연히 다른 지지를 보낸다. 참가자들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는 위드 캠프엔 어떤 매력이 숨어있는 것일까?
● 상금 없어도 참가자 몰리는 이유
위드 캠프엔 참가자들에게 돌아가는 상금이나 혜택이 없다. 보통 우수 아이디어를 유치하거나 행사의 성공적인 개최를 목적으로 여러 가지 보상을 내건 메이커톤이 많다. 하지만 위드 캠프는 물질적인 보상이 없다. 필요한 재료는 직접 준비해 오기도 해야 한다. 그런데도 이 행사가 인기 있는 이유는 사업성이나 실현 가능성을 전혀 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엉뚱한 상상력을 발휘해 만든 물건들이 박수를 받는다. 참가자 표정완 씨는 “바보 같은 아이템을 만들어도 반응이 좋다 보니까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행사를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행사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줬던 장면은 올림픽을 시작하기 전 팀별로 무대에 올라와 자신들이 만든 작품의 콘셉트을 소개했던 순간이다. 중국 팀은 출력을 높이기 위해 건전지 16개를 이어 붙이는가 하면 미국 팀은 압정을 잔뜩 꽂은 채 채찍을 휘두르는 트럼프 대통령을 만들었다. 다른 행사에선 엄두도 못 낼 아이템들이 이곳에선 인정을 받는다. 즐기는 행사라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매년 참가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상대방을 이겨야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경쟁은 대회의 재미를 불어넣는 조미료일 뿐, 다른 팀을 이기기 위해 가능한 기술을 총동원한다. 재미있는 건 기술력이 우수하다고 반드시 승리를 가져가는 것은 아니다. 이번 캠프에서 RC자동차 풍선 터트리기 우승은 스위스 팀이었는데 이 팀의 전략은 상대방을 잘 피하는 알고리즘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위드 캠프 행사가 특별한 또 다른 이유는 초보자든 고수든 모두가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외관을 디자인하고 회로 납땜, 프로그래밍까지 이틀 안에 해결해야 하는데, 시간이 빠듯하다보니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소중하다. 올해 처음으로 해커톤에 참가해봤다는 대학생 한수민 씨는 “소프트웨어를 전공 중이지만 이곳에선 모든 걸 다뤄야 한다”며 “실수 속에서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희열을 느꼈다”고 말했다.
(▲ 사진 = 잘 만든 물건보다 엉뚱한 상상력이 대접 받는 `위드 캠프`)
● "비즈니스 모델은 NO! 즐길 마음이면 충분"
재기발랄한 이 행사를 기획한 사람들은 평범한 직장인과 대학생 들이다. 각종 메이커 대회에서 수상하거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을 만큼 실력도 출중하다. 하지만 대기업이나 정부 주도의 메이커 행사에서 주목받기 위해선 비즈니스 모델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점이 늘 불만이었다. 메이커들이 주도해 재미있게 상상하고 자유롭게 만드는 행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만든 행사가 위드 캠프다. 행사를 기획한 김도균 씨는 “돈이 되지 않는 제안이라고 판단하면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게 안타까웠다”라며 “위드 캠프는 기본적으로 비즈니스 모델은 따지지 않는다고 명시해 메이커들이 자유롭게 개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힘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상금이나 혜택은 메이커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순수하게 만들기를 즐긴다는 메이커 문화를 만드는 데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행사에 참가한 직장인 이연홍 씨는 “메이커 행사에 참여하는 이유는 수상이나 실현 가능한 사업모델을 찾는 것도 아니다”라며 “자기가 만들고 싶은 걸 만들어 뽐내는 과정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위드 캠프가 열리는 시기는 비정기적이다. 행사를 반드시 열어야 한다는 의무가 있는 것도, 누군가의 지시를 받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도전해보고 싶은 주제나 재밌는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면 언제든 열릴 준비가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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