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미국이, 뒤처리는 남들이?…450조 이란 재건기금 논란

입력 2026-06-17 06:36  

전쟁은 미국이, 뒤처리는 남들이?…450조 이란 재건기금 논란
각국기업들 참여 약정 보도도…사실상의 전쟁피해 배상 아니냐 지적 제기
트럼프 정부 "미국 돈 안든다" 강조…'비핵화 약속만 믿고 자금 지원' 비판


(워싱턴=연합뉴스) 백나리 특파원 = 미국과 이란이 종전 양해각서(MOU)에 서명한 가운데 3천억 달러(453조원) 규모로 알려진 이란 재건기금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전쟁은 미국이 해놓고 배상금이나 다름없는 거액의 기금을 다른 나라들이 충당하는 모양새가 될 수 있어서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이란에 현금 다발을 건넸다고 맹비난해온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확실한 비핵화 성과도 없이 이란에 대대적 자금 지원을 허용한다는 미국 내 비판도 커지고 있다.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미국과 이란의 MOU 합의문에는 3천억 달러 규모의 민간 기금을 조성해 이란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들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로이터통신은 소식통을 인용, 전체의 절반이 넘는 자금이 이미 출자 약정된 상태라며 한국, 일본,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미국 기업 등을 거론했다.
JD 밴스 부통령도 3천억 달러의 실체를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돈이 들어가는 건 아니라고 했다.
배상금이나 재건 기금이라고 하면 미국이 패전국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에 트럼프 행정부는 민간 투자기금의 외형을 빌리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란 입장에서는 전쟁 배상금으로 받아들일 소지가 크다. 이란은 개전 이후 협상 국면에서 한동안 전쟁 피해에 대한 배상 요구를 굽히지 않았는데, 결국 민간 기금 형태로 절충점을 찾은 것일 수 있어 보인다.
기금의 '이름표'야 협상을 통해 정하기 나름이라도 해도 이 기금이 걸프국을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 중심으로 조성된다는 점은 문제다.
동맹국과 상의 없이 이란과의 전쟁을 시작해놓고 배상금 성격이 의심되는 기금을 동맹에 마련하라고 압박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보복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성향을 감안하면 각국이 아주 자발적으로 기금 조성에 참여한다고 보기 어렵다.
지난 3월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자 각국이 군함을 파견해 해협 개방을 도우라던 트럼프 대통령의 전쟁 초반 논리와 사실상 유사하다. 당시에도 미국이 전쟁을 일으켜 호르무즈 해협 경색을 초래해놓고 해결의 책임은 남에게 미루려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미국 내에서는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 비핵화의 성과를 확보하기도 전에 '퍼주기식' 보상에 나서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점점 커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획득하지 않기로 했다고 거듭 홍보하고 있지만 아직은 실질적 행동으로 이어지리라는 믿음을 미국 내부는 물론 국제사회가 갖지 못하고 있는 양상이다.
이란의 실질적인 비핵화 의지는 고농축 우라늄 처리와 농축 중단 기간, 핵시설 해체, 국제사회의 사찰 수용 같은 구체적 행동을 통해 가늠해볼 수 있는데 이를 논의할 핵협상은 MOU 서명식 이후에나 시작된다.
사실상 트럼프 대통령이 얻어낸 것이 전쟁 전에 열려있던 호르무즈 해협의 재개방과 '핵무기를 확보하지 않겠다'는 이란의 말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박한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MOU 서명의 대가로 이란의 동결자금 해제에 나설 수는 없다는 입장이기는 하다. 이란은 동결자금을 일부 해제해줘야 후속 협상에 돌입할 수 있다고 맞서고 있다.
대이란 제재완화도 이란의 핵포기 범위와 이행에 맞춰 '행동 대 행동'으로만 가능하다는 게 트럼프 행정부의 주장이다.
그러나 MOU 이후 60일간의 핵협상 기간에 이란이 석유를 판매할 수 있도록 미국이 기존 제재를 면제할 것이라는 미 언론 보도가 나왔다.
사실이라면 제재 완화가 핵포기에 연계돼 있다는 트럼프 행정부 주장과 어긋나는 조치다. 이란이 60일간 호르무즈 해협 통행료를 받지 않기로 한 것과 연계되는 듯한 느낌도 준다.
핵협상 기간에 핵포기 조치를 최대한도로 끌어내기 위한 미국의 신뢰구축 시도이자 '당근'일 수는 있지만 이란에 대한 자금줄 압박을 느슨하게 한다는 점에서 미국 내 반발이 작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오바마 행정부가 이란에 현금다발을 건넸다고 맹비난해온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똑같은 비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돈이 투입되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오바마 행정부 때도 엄밀하게는 이란의 동결자금을 해제하거나 미국이 이란에 원래 줬어야 할 무기대금이 넘어갔다.
CNN방송은 2015년 오바마 행정부의 이란 핵합의 당시 해제된 이란의 동결자금 규모가 약 500억 달러인데 트럼프 대통령은 1천500억 달러가 이란에 건너갔다고 비난해왔다면서 지금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 지원용으로 그보다 훨씬 큰 3천억 달러를 거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미국 내 공화당 강경파 사이에서는 '누구 돈이든 테러국가 이란의 자금줄을 풀어줘선 안된다'는 정서가 강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돈이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만 대이란 제재의 목적은 이란이 핵무기 개발이나 테러세력 지원에 쓸 돈줄을 차단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이란이 앞으로 쥐게 될 돈이 미국 돈이냐, 아니냐는 비본질적이라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조언자로 알려진 마크 티센은 "어떤 상황에서도 이란에 3천억 달러를 주는 건 재앙"이라며 "나치가 권력을 잡고 있는 독일에 재건하라고 마셜플랜을 제시하는 것과 같다"고 비난했다. 오바마의 이란 핵합의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맹비난이 부메랑처럼 돌아오고 있는 셈이다.
nari@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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