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 국가들, 미중 양자택일 압박 완화…부각 안 된 남중국해 갈등
中핑루운하, 對아세안 물류 접근성 확대…무역 불균형 심화는 우려
(서울=연합뉴스) 권숙희 기자 = 미국과 중국이 정상회담을 통해 전략적 안정 기조를 재확인하면서 그간 양국 사이에서 줄타기해온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운신의 폭이 넓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미중 전략 경쟁이 격화할 때마다 양자택일의 압박을 받아온 동남아 국가들의 부담이 줄고 중국 입장에서는 대(對)동남아 관계를 관리할 여지가 커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중국이 최근 서남부 대륙을 동남아와 직접 연결하는 인공운하까지 개통해 경제적으로 공략하는 가운데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국가들의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높아질 것이란 우려도 제기된다.

◇ 미국과의 전략적 안정…中, 대아세안 관계에도 '숨통'
미중 양국이 경쟁 속에서도 일정한 안정 관계를 유지하기로 하면서 동남아 국가들이 양국 사이에서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압박이 완화될 것으로 분석됐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27일(현지시간) 전했다.
루시오 블랑코 피틀로 3세 아시아태평양진보재단 연구원은 "경쟁은 하되 단단한 안전장치를 갖춘 강대국 관계는 갈수록 복잡해지는 세계에서 제3국들의 운신의 폭을 키워준다"고 말했다.
이러한 전망은 미중 안정화가 공급망 분절 속도를 늦추고 대만해협이나 남중국해에서 강대국 간 경쟁 강도까지 낮출 수 있다는 분석을 토대로 나온 것이다.
특히 중국의 생산·공급망과 미국 소비시장을 연결하면서 성장해온 베트남 등에서는 미중 간 해빙 분위기가 직접적으로 부담을 덜어주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이는 중국의 대아세안 전략에도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중 경쟁이 일정 수준에서 관리되면 아세안 국가들은 안보와 경제 등 사안에 따라 미국·중국과 각각 협력하는 '헤징' 전략을 유지할 여지가 커진다.
중국 역시 역내 국가들에 대해 직접 압박하기보다 경제협력의 유인을 확대하면서 관계를 관리할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 회담 결과에 남중국해는 빠져…'G2' 고착화로 역내 패싱은 '경계'
이번 미중 정상회담의 양측 결과 발표에서 남중국해가 직접 언급되지 않은 점도 주목됐다.
중국 관영매체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대만 문제와 관련해 미국에 '대만 독립 반대' 입장을 요구했다고 보도하면서 남중국해나 동남아 문제는 별도로 거론하지 않았다.
미국 측 발표는 미군의 인도·태평양 역할 등을 강조했지만 남중국해 분쟁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이는 양국이 관계를 '전략적 안정' 궤도로 가져가는 과정에서 당장 충돌 가능성이 큰 역내 현안을 공개적으로 부각하지 않으려 한 신호로 풀이된다고 SCMP는 짚었다.
중국 싱크탱크 호라이즌인사이트의 주쥔웨이 소장은 남중국해가 미국의 '인도·태평양' 개념에 포함되지만 이번 정상회담의 핵심 의제는 아니었다면서 이를 발표문에서 제외한 것은 양측이 공개적 마찰을 피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다만 미중 양국이 동남아 국가들 입장과 무관하게 역내 현안을 결정하는 '주요 2개국(G2)' 구도 고착화에 대한 우려는 여전하다.
싱가포르 ISEAS-유소프 이샥 연구소의 베트남 전문가인 응우옌 칵 장 연구원은 "동남아 국가들 중 누구도 G2가 자신들을 제쳐두고 이해관계를 결정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며 "냉전은 한 번이면 충분했다"고 강조했다.

◇ 中, 인공운하 통해 아세안과 직통 연결…높아지는 경제 의존도 우려
중국은 외교적 긴장 관리와 별개로 아세안과의 경제적 결속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최근 개통한 중국 남부 광시좡족자치구 핑루운하다.
2022년 8월 착공한 핑루운하는 총연장 134.2㎞로, 난닝시 헝저우의 핑탕강 하구에서 시작해 친저우시를 거쳐 친강을 따라 베이부만(베트남명 통킹만)으로 이어진다.
운하 개통으로 중국 서남부 내륙 경제권이 남중국해 베이부만을 거쳐 동남아 시장과 직접 연결된 것이다.
기존에는 광저우나 상하이 등 연안 거점을 거쳐야 했지만 운하를 통하면 동남아에 대한 접근 경로가 크게 단축된다.
중국 당국에 따르면 이 노선을 이용하면 중국 서남부 지역 화물의 내륙 수운 거리가 기존 광저우항 경유보다 560㎞ 이상 짧아진다.
동남아산 상품 역시 중국 내륙 깊숙한 시장까지 보다 짧은 경로를 통해 들어올 수 있게 됐다.
실제 아세안 국가의 기업들은 베트남산 커피와 태국산 두리안·쌀·전자부품의 중국 내륙시장 접근성이 좋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운하 개통으로 기대감만 커진 것은 아니다.
아세안 국가들의 대(對)중국 무역 적자가 현재보다 심해질 것이란 우려가 제기된다.
올해 1∼8월 아세안의 중국산 상품 수입액은 전년 동기 대비 25.8% 증가한 5천460억달러(약 744조원)였지만 대중 수출액은 3천167억달러(약 431조원)에 그쳤다.
앨리스 찬 싱가포르 APAC혁신협력센터 대표는 핑루운하를 "양날의 검"이라고 평가하면서 "아세안 전체가 그 영향을 선제적으로 연구하고 최대한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과 같은 무역협정이 중국과 아세안 간 무역 균형을 유지해주는 장치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suk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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