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조선 여성들이 펼친 상상의 세계…소설로 복원"

입력 2019-05-15 17:36  

'대소설의 시대' 출간한 소설가 김탁환

실학파 중심으로 형성된
'백탑파' 다섯 번째 소설



[ 은정진 기자 ] “과거에 한글로 쓰인 소설들을 찾아 읽으면서 18세기 조선이야말로 여성들이 주도한 거대 장편들이 쏟아진 시기라는 걸 알게 됐죠. 박경리 작가 정도 되는 분이 열 명 이상은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상업적으로 소설을 팔고 유통하는 게 아니라 함께 모여 소설을 읽고 이야기하던 순수의 시대였습니다.”

소설가 김탁환(사진)은 15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최근 펴낸 장편 《대소설의 시대》(민음사)를 쓰게 된 계기를 이같이 설명했다. 그는 2003년 《방각본 살인 사건》을 시작으로 18세기 실학파를 중심으로 형성된 집단인 ‘백탑파’를 다룬 소설을 연작으로 써 왔다. 《대소설의 시대》는 《월하광인》 《열녀문의 비밀》 《목격자들》에 이은 ‘백탑파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이다.

이 소설은 정조의 어머니이자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부터 필사 궁녀에 이르기까지 궁중에서 23년 동안 읽혔던 대소설 《산해인연록》을 둘러싼 이야기를 그린다.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하던 18세기에 여성 작가가 쓰고 여성 독자가 읽었던 대소설(장편소설)이 궁중을 중심으로 어떻게 창작되고 유통됐는지를 작가의 상상력으로 풀어냈다.

이번 작품에도 전작 시리즈에서 나온 김진과 이명방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탐정처럼 등장한다. 두 사람은 남성이지만 정작 소설을 베끼고 쓰고 읽는 인물들은 모두 여성이다. 김진은 이명방에게 《산해인연록》을 쓴 작가가 여성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한다. “산해인연록의 밑바탕엔 여자 작가들과 여자 독자들이 100년 넘게 쌓아온 상상의 세계가 깔려 있다네. 청나라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는 우리만의 소설이야.” 작품 전체가 담은 의미를 아우르는 말이다. 작가는 “대소설들은 조선이 아니라 송과 명을 배경으로 한 아시아 대륙 전체를 가상공간으로 삼아 실존 인물과 가상인물을 섞어 상상력을 펼쳤다”며 “한글이 존재했기에 여자들이 상상력을 발휘하기가 더 수월했다”고 말했다.

소설 목차는 ‘엄씨효문청행록’ ‘유씨삼대록’ ‘명주보월빙’ 등 모두 실존하는 고전 한글 대소설 22개 제목이다. 이전에 거의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작품들이다. 그는 “여자들을 중심으로 쓰고 읽혔던 당시 한글 대소설들과 지금 우리들 사이엔 거대한 단절과 망각이 있다”며 “뛰어난 소설들임에도 이후 남성 작가들의 헤게모니에 의해 역사 속에서 잊혀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계몽’이나 ‘애국’이라는 주제를 바탕으로 한 남성 작가 중심의 근대소설들이 등장하면서 여성 중심 소설 시대가 조용히 사라졌다는 설명이다. 그는 “최근 페미니즘 열풍으로 문학 권력이 여성 작가와 여성 독자들로 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1700년대 이미 여성 중심의 소설 판이 형성됐었음을 다시금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단편소설이 유행인 한국 문단 트렌드에서도 작가가 꿋꿋이 고수하는 장편소설의 매력은 무엇인지 물었다. “장편소설은 당대 정치·사회·문화적 문제들에 질문하고 깊게 들어가 정면승부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작품 속에 작가 자신을 다 보여주죠. 《대소설의 시대》도 여성들이 문학을 통해 사회 곳곳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대소설’에는 ‘소설이 다루는 문제의 해결 방법은 이 소설만이 말할 수 있어, 그러니 이 소설을 봐야 해’라고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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